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488
한자 六·二五戰爭
이칭/별칭 한국전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가평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주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0년 6월 25일연표보기 - 6·25전쟁 발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0년 6월 25일~28일 - 국군 제6사단의 가평지구 전투 전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1년 4월 23일~25일 - 영연방 제27여단의 가평 전투 전개

[정의]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까지 경기도 가평군을 포함해 한반도 전역에서 전개된 남한과 북한의 전쟁.

[가평군내 주요 전투]

서울 북동부에 위치한 가평군은 휴전선에 인접한 경기도와 강원도의 북단 지역처럼 6·25전쟁 격전지가 많다. 가평군에서 펼쳐진 전투는 다음과 같다.

먼저 춘천-가평 전투로 1950년 6월 25일부터 6월 28일까지 국군 제6사단 예하 제7·19연대가 북한군 제2군단 제2보병사단과 제12보병사단 예하 31연대의 전진에 맞서 싸웠다. 국군은 인민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밀려 퇴각하였다.

가평군에서 큰 전투가 전개된 것은 1951년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전개된 이후이다. 여러 전투가 곳곳에서 이어졌고 양측에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 가장 주목할 만한 전투는 ‘가평지구전투(加平地區戰鬪)’이다. 이 전투는 북면 일대에서 1951년 4월 23일부터 25일까지 중공군의 춘계대공세에 맞서 영국·호주·캐나다·뉴질랜드 군[영국연방]이 치열하게 싸웠다. 당시 영국연방 제27여단이 가평 일대에서 중공군 제118사단의 공격에 맞서 방어에 성공하였다. 이 전투는 서울에서 춘천 간의 도로를 향해 진격하던 중공군을 저지하여 한국군과 유엔군의 퇴로를 확보하고 한국군과 유엔군의 피해를 막아냈다. 이로써 6·25전쟁의 새로운 전환점이 마련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중공군의 공세는 계속되어 1951년 5월에는 국군 제6사단과 중공군 제63군 예하 3개 사단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용문산전투로 이어졌다.

[청년들의 반공투쟁과 전적비]

민간 차원의 반공투쟁도 다양하고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6·25전쟁 발발 후 가평 지역이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청년들은 반공산악동지회·임산의혈대·학도의용대 등 결사대를 조직했다. 특히 북면 적목리와 인근 지역에서 인민군이 점령했을 때와 1951년 1·4 후퇴를 전후한 시기까지 의혈대, 결사대, HID대원 등의 다양한 반공투쟁이 전개되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이후 가평군에서는 가평군에서 전개된 6·25전쟁을 기념하고 그 의미를 알리고자 전투가 벌어졌던 곳을 중심으로 다양한 기념비와 기념물이 세워졌다. 대표적인 6·25전쟁 기념물은 가평읍, 청평면, 북면 일대에 집중적으로 건립되었다. 가평읍에는 가평지구 전투전적비[1958년 3월], 영연방 참전기념비[1967년 9월], 현충탑[1972년 6월], 6·25 반공투쟁산악대원 전적비[1999년 4월], 학도의용대 참전비[2000년 11월]가 있다. 청평면창의탑[1971년], UN 72탱크부대 참전기념비, 용문산전투 가평지구 전적비[1997년 6월]가 있고, 북면에는 호주 전투기념비[1963년], 뉴질랜드 6·25전쟁 참전비[1963년 4월], 캐나다 전투기념비[1975년], 유엔군 프랑스대대 참전기념비, 반공희생자위령비[1987년], 6·25전쟁 미군 참전기념비[2011년]가 있다.

6·25전쟁 관련 기념비는 가평이 남한과 북한의 주요 전장이었음을 대변하는 실체이자 분단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6·25전쟁과 관련된 각종 기념비와 기념물들은 그날의 의미를 복원하면서 전쟁의 상흔과 분단의 아픔을 극복하고 통일로 가는 이정표로 남아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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