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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부터 1945년까지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에게 식민통치를 당했던 영주 지역의 역사. 일제강점기 영주 지역은 식민지 수탈 상황 속에서 전개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정치적으로 영주 지역은 일제의 식민정책 기조에 따른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영주군이 새로 생겼으며, 1940년 영주면이 영주읍으로 승격되었다. 또 1910년대 일제의 무단 폭압정치 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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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부터 1945년까지 영주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민족해방운동. 영주 지역의 독립운동(獨立運動)은 1895년(고종 32) 을미의병에서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1895년 을미의병기 영천(榮川)·풍기·순흥에서는 의병진이 결성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05년 이후 을사의병과 1907년 이후 정미의병에서 대일항전이 전개되었다. 191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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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21일부터 1919년 4월 11일까지 경상북도 영주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 1919년 서울에서 비롯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무렵 영주 지역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영주 지역의 만세시위운동은 1919년 3월 21일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을 시작으로 1919년 4월 9일 풍기면 만세시위운동, 1919년 4월 11일 장수면 만세시위운동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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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영주 지역에서 전개된 청년운동.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청년운동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마련되었다. 이에 1920년대 초반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청년 단체들이 폭발적으로 조직되었으며, 청년 단체들에 의한 청년운동은 1920년대 민족운동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1920년대 초 청년운동은 지역의 유지와 지식인, 청년층을 중심으로 지식 계발·문화 창달·체력증진을 목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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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영주 지역에서 전개된 교육 운동.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조선인과 일본인 교육을 엄격히 차별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초등교육기관을 4년제와 6년제로 구분한 뒤, 조선인 초등교육기관은 대부분 4년제로 설립 인가하였다. 6년제 보통학교를 졸업해야 상급 교육기관인 중학교[오늘날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할 기회가 주어졌다. 이러한 차별을 통해 조선인의 교육 기회를 제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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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1930년대 영주 지역에서 전개된 농민운동. 1910년대 일제는 근대법적 토지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목 아래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해 식민지 지주제를 확립시켰다. 이어 1920년대에는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식민지 지주제를 강화하는 한편, 농업 수탈을 가속화되면서 농민층의 몰락은 빨라졌다. 그 과정에서 조선의 농민은 수확물의 50~80%에 이르는 고율의 소작료, 지세·호세·지세부가...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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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부터 1980년까지 경상북도 영주 지역에 설치되었던 지방행정구역. 영주군(榮州郡)은 1914년부터 1980년까지 지금 영주시 일대에 두어졌던 지방행정구역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효율적인 식민 지배를 위하여, 토지조사사업 등을 통한 방대한 국토 자료를 바탕으로 1914년 3월 1일 전국을 13도 12부 220군으로 개편하였다. 특히 기존 군의 경우 면적·인구...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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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영주 지역에서 채기중이 주도하여 조직한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은 1913년 1월 채기중(蔡基中)을 비롯해 전원식(全元式)·정성산(鄭星山) 등 10여 명이 경상북도 풍기군[지금의 영주시 풍기읍]에서 결성한 비밀결사조직이다. 1910년 한일합방과 함께 의병투쟁이나 계몽운동을 전개했던 민족지사들은 국권 회복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을 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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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영주 지역에서 설립된 청년단체. 영주청년회(榮州靑年會)는 1920년 6월 영주에서 조직된 실력양성론 입장에서 청년운동과 문화운동을 전개한 청년단체이다. 영주청년회는 적성 함양, 학문 증진, 체육발전, 의사교환, 풍속 교정 등을 목적으로 세워졌다. 영주청년회는 1927년 11월 24일 전국적인 청년운동 혁신에 조응해 풍기청년회와 연합하여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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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영주 풍기 지역에서 설립된 청년단체. 풍기청년회(豊基靑年會)는 1923~1924년경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일대에서 조직된 청년운동 단체이다. 풍기청년회는 1923년 1월 창립된 풍기소작조합과 활동 노선을 함께하고, 조선청년총동맹의 방침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며 활동하였다. 풍기청년회는 설립 시기가 명확하지 않아, 설립 당시 목적을 파악하기가 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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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영주 지역 영주청년회와 풍기청년회가 연합으로 결성한 군 단위 청년단체. 영주청년동맹(榮州靑年同盟)은 조선청년총동맹의 부군 청년동맹 결정 방침에 따라 영주청년회와 풍기청년회가 통합되어 1927년 11월 24일 결성된 청년운동 조직이다. 영주청년동맹은 창립 후 지부 설치 활동을 통해 영주 청년운동의 통일적 조직 체계를 갖추어 나갔다. 또한, 민족협동전선운동 차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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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영주 지역에서 설립된 농민단체. 풍기소작조합(豊基小作組合)은 1923년 3월 풍기·봉현·안정 등 3면을 중심으로 창립되었다. 창립 당시 집행위원장 강응진(姜應鎭)을 비롯해 각 동 대표 40명의 집행위원이 선출되었다. 풍기소작조합은 소작농의 경제적 이익 옹호와 농민계몽 등을 설립 목적으로 삼고 있다. 풍기소작조합은 1925년에 “세계 조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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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영주 지역에 설립된 신간회 산하 지회. 신간회(新幹會)는 일제강점기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통일전선에 의해 성립된 민족운동 단체이다. 1927년 2월 신간회가 결성된 후 전국의 사회운동 단체들이 지지 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족운동이 활성화되었고, 이는 전국적인 지회 설립으로 이어졌다. 영주 지역에서도 1927년 8월 29일 영주청년회관에서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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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영주 지역에 설립된 근우회 산하 지회. 근우회(勤友會)는 1927년 5월에 결성된 신간회(新幹會)의 자매기관으로 여성해방과 민족해방이라는 과제를 목표로 활동하던 단체였다. 근우회 영주지회는 1929년 4월 2일 신간회 영주지회 강당에서 창립대회를 열고 조직되었다. 근우회는 조선 여성의 공고한 ‘단결’과 ‘지위 향상’을 목표로 하였는데, 근우회 영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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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영주 지역에 설립된 농민단체. 영주농민조합(榮州農民組合)은 1929년 3월 개최된 제3차 풍기농우동맹 정기대회에서 풍기농우동맹을 해체하고 창립하였다. 영주농민조합은 군 단일 농민조직으로 이후 지부 설치에 집중하였다. 영주농민조합은 영주 지역 내 단일 농민조직을 결성하고, 그 과정에서 기존 소작인 조합을 농민조합으로 확대·개편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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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경상북도 영주 지역의 대한광복회 회원 박제선·권영목 등이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된 사건. 대동상점사건(大同商店事件)은 영주에 설립된 상업 조직인 대동상점에서 펼친 독립활동이 발각된 사건이다. 1915년 8월 박제선(朴濟璿)·권영목(權寧睦) 등이 영주시장에 대동상점을 세웠으며, 그 과정에서 유명수(柳明秀)·정응봉(鄭應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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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영주에 우거하던 강택진 등이 조선13도총간부라는 단체에서 독립활동을 하다 체포된 사건. 조선13도총간부사건(朝鮮十三道總幹部事件)은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13도총간부에서 군자금과 인력을 모집하다가 조직원들이 체포된 사건이다. 1919년 10월 강택진(姜宅鎭) 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하여 조선13도총간부를 결성하였다. 이후 영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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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21일 경상북도 영주 지역의 영주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은 1919년 3월 21일 영주장터에서 일어났다.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은 박인서(朴仁緖)·오하근(吳夏根)·권태중(權泰中)이 주도했다. 박인서·오하근·권태중은 준비해 간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출동한 일본군 헌병들에게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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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9일 영주 지역의 풍기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은 영주군 봉현면 농민 안용호(安容鎬)·남영진(南永鎭)·최성원(崔盛源)이 주도하였다. 안용호·남영진·최성원은 1919년 4월 9일 영주군 풍기면 장터에서 준비한 태극기를 가지고 오후 3시 무렵 만세시위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군 헌병들에 의해 안용호 등 주도자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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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11일 영주의 장수면 호문리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 장수면 만세시위운동은 1919년 4월 11일 영주군 장수면 호문리에 있는 청년 손달익(孫達翼)이 호문리 마을 서당에서 같이 공부하는 장윤덕(張潤德)·송득용(宋得龍)·손용백(孫龍伯)·황학명(黃學明) 등과 함께 호문리 마을 앞산으로 올라가서 벌인 만세운동이다. 그러나 호문리를 순찰 중이던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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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부터 4월까지 영주 지역 유림 대표들이 국제사회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청원한 독립운동. 1919년 3월 곽종석(郭鍾錫)[1846~1919]을 대표로 한 영남 유림과 김복한(金福漢)[1860~1924]을 대표로 한 호서 유림 등 137명이 유림단의 이름으로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독립청원서」를 보냈다. 이때 영주 지역 출신으로 참가한 인사는 김동진(金東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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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에서 1926년 사이 영주를 비롯해 경상북도 일대에서 전개된 유림 대표들의 군자금 모집 활동. 제2차 유림단의거는 1925년 국외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한 자금 모금을 위해 시작되었다. 송영호(宋永祜)를 비롯해 영주 지역 출신으로는 송재호(宋在祜)·김동진(金東鎭)·김제직(金濟稷)·권상수(權相銖)·박제형(朴濟衡) 등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1926년 관련자들이 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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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영주 지역에서 전개된 혁명적 농민운동. 세계 대공황 이후 점증하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대대적인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식민지 조선에서는 농민운동이 1920년대 후반부터 민족운동으로 확대·발전하는 가운데, 일제의 정책에 대응하여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이 전개되었다. 영주의 농민조합운동은 1931년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를 시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