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3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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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十三道總幹部事件 |
영어공식명칭 | Joseon 13do Chongganbu Event(Historical Ev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9년 10월 23일 - 조선13도총간부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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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21년 3월 - 조선13도총간부 종결 |
발생|시작 장소 | 조선13도총간부사건 발생 장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
성격 | 독립운동 |
관련 인물/단체 | 강택진|박시묵|박상목 |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에 우거하던 강택진 등이 조선13도총간부라는 단체에서 독립활동을 하다 체포된 사건.
[개설]
조선13도총간부사건(朝鮮十三道總幹部事件)은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13도총간부에서 군자금과 인력을 모집하다가 조직원들이 체포된 사건이다. 1919년 10월 강택진(姜宅鎭) 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하여 조선13도총간부를 결성하였다. 이후 영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다 송부였으나 1920~1921년 주요 관련자가 체포되면서 조직은 해산되었다.
[역사적 배경]
1910년 한일합병으로 인해 더는 국내에서 국권 회복운동을 전개하기가 어려워졌다. 이에 1910년대 이후 많은 민족지사들이 만주로 이주하였고, 그중 일부는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시도하였다. 한편으로는 만주로 건너간 민족지사들이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모집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조선13도총간부라는 독립운동 단체가 조직되었다.
[경과]
조선13도총간부는 1919년 10월 23일 강택진을 비롯해, 박시묵(朴時黙)·박상목(朴尙穆) 등이 서울 가회동(嘉會洞) 취운정(翠雲亭)에서 김일제(金一濟)·이상욱(李相旭)·송병조(宋秉朝)·윤태선(尹泰善) 등과 함께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이다. 조선13도총간부는 총무·노동·재무·경무·편집·교통·교섭 등 7개 부서로 구성되었다. 강택진은 교섭부, 윤태선은 총무부, 박상묵은 노동부, 박시묵은 재무부, 송병조는 경무부, 이상욱은 편집부, 김일청은 교통부를 맡았다.
조선13도총간부는 전국 각지의 부호들에게 애국금 출연을 권유하는 유고문을 발송하였다. 이어 강택진과 박시묵은 경상북도, 윤태선은 함경남북도, 박상목은 평안남도, 김일청은 평안북도, 송병조는 경상남도를 각각 담당하여 군자금 모집을 총괄하였고, 각도 책임자 아래 특파원을 파견하여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을 실질적으로 모집하였다.
경상북도 책임자 강택진은 박시묵과 함께 영주 지역의 자산가 김교림(金敎林)·이풍환(李豊煥)·정후섭(丁後燮)·정규창(丁奎昌)·정규집(丁奎集) 등에게 조선13도총간부 명의의 유고문을 발송하고 군자금 출연을 요구하였다. 또 박시묵은 경북 특파원 이재영(李在永)·강천민(康天民)·곽병도(郭炳燾)를 통해, 안동의 이균호(李均鎬)·유인식(柳寅植)·유시혁(柳時赫)·유시일(柳時一)·유동시(柳東蓍)·권태연(權泰淵) 등 수 명에게 찬의사의 사령서를 교부했다.
영주에는 1918년 10월 하순 무렵 경상북도에는 이재영과 강천민이 파견되어 김교림·이풍환·정후섭 등에게 애국금 수합위원의 사령서를 교부했다. 그러나 실제 군자금 모집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에 강택진은 서울 연동의 김철수(金哲洙)의 집에서 박시묵·이재영 등과 함께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에 관한 방법을 숙의하였다. 강택진은 김교림·이풍환·정후섭·정규창·정규집·안태열·오용군 등에게 유고문을 보내기로 하고, 곽병도를 다시 파견하였다.
1919년 10월 하순 곽병도와 이재영은 영주로 가서 애국금을 제공하도록 권유하였다. 이들은 1919년 10월 하순부터 1920년 12월까지 김교림에게 200원, 이풍환에게 500원 및 200원 상당의 백삼 20근, 정규창에게 1,200원, 정후섭에게 400원, 정규집에게 400원을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부하였다. 1920년 음력 정월 말경 강택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상황과 만주 및 노령의 독립운동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상하이[上海]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계자 안창호(安昌浩) 등을 만나 조선13도총간부의 조직과 활동을 보고하였다. 이 자리에서 강택진은 안창호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이 매우 희망적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고, 법무총장 신규식(申圭植)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의 지원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을 부탁받았다. 그러나 강택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상황에 대해 다소 실망감을 안고 귀국하였다. 이후 강택진은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법을 모색한 결과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
강택진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갈 즈음인 1920년 음력 정월 말경 조선13도총간부의 윤태선과 박상목이 일제 관헌에게 체포되었다. 그 후 1921년 3월경 강택진·곽병도 등이 일제 관헌에게 체포되면서 조선13도총간부는 실질적으로 해산되었다. 1921년 6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조선총독부제령 제7호, 1919년 4월 15일 제정]으로 강택진 징역 2년, 곽병도는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강택진은 1922년 5월 가출옥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13도총간부사건은 단원들이 체포되면서 해체되었으나, 1910년대 무단통치 하 국내 민족지사들이 국외 독립운동 세력을 지원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