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8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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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蔡東鎭 |
영어공식명칭 | Chae Dong-ji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채동진(蔡東鎭)[1878~1967]은 1919년 4월 4일 은산장터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이 일로 체포되어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가계]
채동진은 경상도 풍기군 하리면 금곡동[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은풍면 금곡리]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채동진은 농사를 지었으며, 평소 한학을 공부하였다. 채동진은 일제 식민통치에 불만과 반발심을 가지고 있던 중, 고종황제의 서거와 전국의 만세시위운동, 그리고 이웃한 예천군 용문면 만세시위운동 소식을 들었다. 이에 같은 마을의 이용헌(李容憲)[1880~1934]·이재덕(李宰德)[1866~?]·이헌호(李軒頀)[1874~1938]·권창수(權昌銖)[1892~1970] 등과 의논하여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채동진은 이용진 등과 함께 1919년 4월 4일 은산장터에서 음식점을 하는 황병석(黃炳奭)의 집에 모여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식사를 마친 뒤 몇 차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채동진은 이용진 등과 거리를 돌며 장꾼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대한독립만세를 계속 외쳤다. 군중이 모여들자 “일본군 헌병주재소와 면사무소로 가서 이를 파괴하자”라고 외치며 군중을 앞에서 이끌었다. 시장에서 만세시위 소식을 듣고 일본군 수비대와 헌병들이 황급히 출동하였다. 이들에 의해 채동진 등 주동자 5명은 체포되어 1919년 4월 12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채동진은 이에 불복하고 공소하였으나 1919년 5월 1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채동진은 2006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