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11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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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鷄里洞祭 |
영어공식명칭 | Dongje of Geumgye-ri(Ritual) |
이칭/별칭 | 동성황제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제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중휘 |
재개 시기/일시 | 1980년 - 금계리 동제 신당 재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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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 장소 | 당집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
성격 | 동제 |
의례 시기/일시 | 정월 15일 자정 이후 축시 |
신당/신체 | 당집|동성황신 |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에서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금계리 동제는 정월 대보름 자정 이후 축시(丑時)에 마을에서 떨어진 개울 앞 신당에서 지낸다. 신당에는 동성황신이라 불리는 신격의 석상이 있다.
[연원 및 변천]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에서 언제부터 동제를 지냈는지는 불분명하나 동성황신은 400년 전 마을에 들어와서 사람들을 품고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져 그 시기를 추정해볼 수 있다. 한편 신당은 금계2리가 금양촌이라 불릴 무렵부터 있었으나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미신타파정책에 의해 허물어졌다. 그 이후 마을에 흉사가 자꾸 일어나 1980년 일부 주민들의 주장에 의해 새로운 땅을 사 다시 당집을 세우고 동제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신당이 들어선 이후에는 마을이 평안해졌고, 신당이 세워진 것을 반대하거나 신당을 부수려고 한 사람들은 화를 당했다고 한다. 과거에는 동제를 지낸 이후 동네에서 풍악을 울리며 잔치를 하고 놀았으나 현재는 행하지 않는다.
[신당/신체의 형태]
동신이 모셔져 있는 신당은 1평 정도 크기에 함석으로 지어진 당집으로 마을에서 100m 떨어진 들의 중간쯤 개울 앞에 자리 잡고 있다. 당집 앞에는 마을에서 위하는 동성황신이 석상으로 모셔져 있고, 석상[신체] 옆에 비석, 석상 앞에 제단이 있다. 비석에는 10여 년 전 동제를 다시 지낼 수 있도록 한 추진위원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당집 문 앞에는 금줄이 드리워져 있다.
동신의 신격은 동성황신으로 신격은 남신이며 단군의 모체로 여겨진다. 현재 신체는 부처와 흡사한 모양의 석상으로 모셔져 있는데, 몸에는 박달나무 잎으로 무늬가 새겨져 있고 머리에 쓴 둥글면서도 모가 난 모자는 오방(五方)을 의미한다. 원래 신체는 위패에 지방만 쓴 것이었으나 손실의 우려가 있어서 석상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당집 바로 옆에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둘레에 어린 느티나무가 에워싸듯 서 있다. 어린 느티나무는 신당을 지을 무렵 10여 평[약 33㎡]의 땅을 사들이면서 신당 자리를 표시하기 위해 심은 나무이다.
[절차]
금계리 동제는 ‘동성황제’라 불리며 정월 대보름 자정 이후 축시(丑時)에 지낸다. 제관은 동제 7일 전에 생기복덕을 가려 제관[제주], 아헌관, 축관 등 4명을 선출한다. 그러나 아주 젊은 사람은 피해 40세 이상의 남자로서 상주가 아니며, 가족 중 최근에 출산했거나 임신한 가족이 없어야 하고 제의가 끝날 때까지 부인에게 월경도 없어야 한다. 이렇게 제관으로 선출되면 모든 부정을 보고 듣지 못하도록 금족령이 내려진다. 제관의 집 대문 앞에 금줄을 치는 것은 물론 매일 목욕재계하며 부정한 것을 보거나 말을 듣거나 조금이라도 좋지 않은 이야기는 발설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불난 곳, 싸우는 곳에도 가지 않으며 살생을 금하고 자기 몸에 작은 상처라도 나지 않도록 특히 유의하며 심지어 자기 집 제사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제물을 차리는 도가 역시 그 집 부부가 모두 생기복덕이 맞아야 하며 상가에 가거나 흉한 것을 보지 않은 깨끗한 사람이어야 하며 집 대문에도 역시 금줄을 친다. 동제 때 쓴 제기와 제복, 자리[돗자리] 등은 도가에서 1년간 보관하고 있다가 다음 해 도가로 넘겨준다. 제기도 전에는 목기를 사용했으나 상할 우려가 있어 근래에는 스테인리스 그릇으로 바꾸었다. 1992년에는 도가의 집이 협소하여 어쩔 수 없이 다른 집에서 맡았는데 대단히 조심스럽게 정성을 다해 보관하고 있다.
제물은 떡, 돼지머리, 삼실과[대추·밤·곶감]를 올린다. 떡은 시루째 하는데 쌀을 3되 3홉을 쓰며, 떡을 시루에 찔 때 그 모양을 보고 마을 일을 점친다. 예부터 떡시루의 모양이 평평하면 동네가 평안하고 언덕이 지면 마을에 일이 생기며 부글부글 끓으면 마을에 말썽이 있겠다고 예견한다. 요즘은 번거로워서 술을 사서 쓰지만, 그전에는 제주를 직접 만들었다.
동제에 드는 비용은 각 집에서 추렴한다. 동제를 한번 지내는 데 드는 비용은 약 10만 원 정도 되며 제관들이 제 지낼 때 입는 제복 역시 동제를 단절시킬 때 없었으나 동제를 부활시키면서 다시 만들어 현재 흰 두루마기를 입고 유건을 쓴다. 동제의 절차는 가정에서 지내는 유교식 제례와 유사하여 음식을 진설하고 술을 올린 다음 흠향하게 한다. 이렇게 동제를 마친 뒤 도가에 와서 음복한다. 이때 부정한 사람은 출입을 금한다.
[현황]
1964년까지는 금계리 동제를 지낸 후 음복을 하고 대동제로서 풍악을 울리며 마을 잔치를 벌였으나 요즘은 간단히 마을 회의를 하고 그 자리에서 동장 선출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