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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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渭吉 |
영어공식명칭 | Song Wi-gil |
이칭/별칭 | 송중섭(宋仲燮)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출생 시기/일시 | 1909년 11월 24일 - 송위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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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30년 - 송위길 영주 2차 격문 투쟁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89년 8월 18일 - 송위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3년 - 송위길 건국포장 추서 |
출생지 | 송위길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
거주|이주지 | 송위길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
활동지 | 송위길 활동지 - 경상북도 영주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영주 2차 격문 투쟁 참여 |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송위길(宋渭吉)[1909~1989]은 영주청년동맹과 신간회 영주지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중 광주학생운동에 영향을 받아 1930년 격문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가계]
송위길은 1909년 11월 24일 지금의 영주시 영주동에서 출생하였다. 송중섭(宋仲燮)이라고도 한다.
[활동 사항]
1929년 광주학생운동은 영주에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영주에서는 영주청년동맹과 신간회 영주지회의 회원들이 일제의 한국 식민 지배에 대해 저항하며, 독립의 투쟁을 촉구하는 격문 투쟁을 수차례 전개하였다. 이미 송위길이 속한 영주청년동맹에서는 광주학생운동이 발생한 직후인 1929년 11월 13일 제6회 집행위원회를 열고 ‘광주학생충돌사건’을 조사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또 송위길은 신간회 영주지회의 선전부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신간회 본부에서는 지회의 활동성을 평가하였는데, 신간회 영주지회는 5등급 중 가장 높은 등급을 부여받았다.
송위길은 1930년 3월 영주 2차 격문 투쟁을 준비하게 된다. 1930년 3월 16일 송위길은 이상을(李相乙)[1907~1944]과 함께 격문을 작성한 후, 영주청년동맹 영주지부 회관에서 등사기로 763매를 인쇄하였다. 그리고 김회길(金會吉)·김계진(金季鎭)[1907~2000]·정회복(丁會福)·박승헌(朴勝憲) 등과 함께 1930년 3월 24일 영주장날 정오를 기해 살포하기로 결의하였다. 송위길은 이날 정회복과 함께 어시장에서 격문을 살포한 후 함께 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격문에는 ‘조선민족해방’과 ‘무산계급해방만세’를 비롯해, 당면 구호로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획득하자’, ‘모든 악법을 철폐하자’, ‘소위 광주학생사건 피고들의 무죄를 주장하자’,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조선총독 폭압정치에 항쟁하자’, ‘투옥 동지를 탈환하자’ 등의 정치적 투쟁 사항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거사 하루 전인 1930년 3월 23일 밤 일제 관헌에 발각되어, 송위길 등 이른바 영주 2차 격문 투쟁을 준비하던 인사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송위길은 1930년 4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출판법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언도받았다.
[상훈과 추모]
송위길은 1993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