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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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承稷 |
영어공식명칭 | Lee Seung-jik |
이칭/별칭 | 이선규(李善奎)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89년 - 이승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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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5년 - 이승직 건북유한공사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16년 - 이승직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이승직 영주청년회 강연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 이승직 동아일보사 안동지국 영주분국장 역임 |
추모 시기/일시 | 2016년 - 이승직 대통령표창 추서 |
출생지 | 이승직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 |
거주|이주지 | 이승직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 |
활동지 | 이승직 활동지 -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동아일보사 안동지국 영주분국장 |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이승직(李承稷)[1889~?]은 1915년 건북유한공사(建北有韓公司)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가계]
이승직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 출신이며, 다른 이름으로 이선규(李善奎)를 사용하였다.
[활동 사항]
이승직은 1915년 음력 6월경부터 서울에 있으면서, 익선동의 차진원(車鎭源), 도렴동의 이강래(李康來)와 김정빈(金正彬)의 집에서 이강래·김정빈·이승호(李承鎬)[1890~1966]·남정호(南廷鎬)·류연건(柳淵建)[1892~1951]·신언학(申彦學) 등의 동지들과 함께 회합하고 국권 회복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에 앞서 이들은 “중화민국 총통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가 구한국 공사였던 시대에 그 알선 때문에 당시 중국 육군 장관 마건충(馬建忠)[1845~1899]이 은 26만 양을 고종으로부터 대여하여, 그 내용의 증서를 이태왕에게 차입하였다”라는 것을 들었다. 이에 의친왕을 통해 고종으로부터 이 증서를 건네받아, 이것을 가지고 위안스카이와 교섭해서 독립운동자금으로 충당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나아가 동지들을 모아 간도의 비옥한 땅으로 이주해, ‘건북유한공사’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신한국 건설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특히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개최될 것으로 예상하는 국제회의 때, 위안스카이가 한국의 독립을 제의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자 했다. 이에 이승직 등은 1915년 음력 8월부터 9월까지 고종과 의친왕 명의의 위조인(僞造印)을 만들어 성명서·위임장·유시문(諭示文) 등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동지를 규합하기 위하여 이 문서를 각자 지니고, 서울을 비롯해 경상도와 황해도 등지를 다니면서 유세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이승직은 1916년 4월 11일 동지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16년 10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 90도를 선고받았다.
이승직은 출옥한 후에는 영주 지역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런 가운데 1920년 9월 11일 영주청년회가 개최한 제2회 강연회 때 ‘청년의 급선무’라는 주제로 강연을 맡는 등 민중계몽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해 나갔다. 1921년 3월에는 동아일보사 안동지국 영주분국장을 역임하였다.
[상훈과 추모]
이승직은 2016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