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015
한자 佛敎
영어공식명칭 buddhism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가평군
시대 현대
집필자 이현아

[정의]

경기도 가평 지역에서 석가모니를 교조로 신앙 및 포교활동을 하는 종교.

[개설]

불교는 삼국시대에 들어와 고려시대까지 화엄종, 법상종, 선종 등 많은 교단이 생겨나면서 번창하였다. 조선시대에 왕실의 정책에 따라 통제 대상이 되어 어려움을 겪었으나 한편 왕실이 후원하는 원찰(願刹)이 있어 명맥을 이어갔다. 일제 강점기에 사찰령으로 인해 30본산(本山)이 지정되어 불교 종파 전체가 통폐합되었고, 해방 이후 친일 잔재를 청산하는 문제로 분란이 있었다. 이 때 한국 불교 종단이 다시 여러 갈래로 나눠지게 되었으며, 국내 종단 및 단체는 2018년 기준 총 482개로 많아졌다. 가평 지역의 불교도 역사적 흐름 속에서 승려의 이야기와 전통사찰 현등사대원사가 전해지며, 2019년 기준 9개의 종단과 81개의 사찰이 속해 있다. 가평 지역의 불교는 전통사찰과 승려, 관련 문화재 등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가평 지역의 전통사찰]

현등사(懸燈寺)는 540년(법흥왕 27) 인도 승려 마라가미(摩羅訶彌)가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운악산에 창건한 사찰로,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한 차례의 폐사와 세 차례의 중창을 거쳤다. 현대에 이르러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 봉선사(奉先寺)의 말사로 이어지며, 가평군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운악산현등사사적(雲嶽山懸燈寺事蹟)』에 따르면, 540년(법흥왕 27) 인도 승려 마라가미가 불법을 전하러 왔을 때 왕이 절을 창건해 준 것이 시작이다. 절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훗날 ‘운악산사(雲嶽山寺)’로 일컬었다. 첫 번째 중창은 898년(효공왕 2) 구산문(九山門)의 동리산문(桐裏山門) 출신 도선(道詵)이 이루었다. 고려의 도읍을 개경(開京)으로 정하고 송악산(松嶽山) 아래 기가 허한 세 군데에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동쪽 땅의 기를 보충하고자 정한 곳이 현등사 자리였다고 한다. 두 번째 중창은 1210년(희종 6)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이 주도하였다. 지눌이 운악산을 바라보니 불빛이 있는 곳에 절터와 관음당이 있었고, 불당 앞 석등의 불이 꺼지지 않아 절을 세웠다고 한다. 바로 꺼지지 않는 불에서 유래되어 ‘현등사(懸燈寺)’라는 명칭이 생겨났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마지막 중창은 1411년(태종 11) 함허대사(涵虛大師) 기화가 수행하였다. 기화운악산에 들었을 때 길을 잃었고, 사슴이 인도하여 전각이 한 채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리하여 왕실의 원당(願堂)을 그곳에 세우고, 왕으로부터 300결의 토지를 받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세 차례의 중창 다음에도 1811년(순조 11)에 취윤(就允), 원빈(圓彬)이 사찰 전반을 중수하였으며, 1891년(고종 28) 상궁 하씨가 화주가 되어 절을 중수하였다, 1893년 호운(浩雲), 우화(雨華)가 석축을 보수하는 등 완전한 가람의 모습을 갖추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에 다수의 전각이 소실되었다. 1961년과 1975년에 성암(省庵)이 중수하였고, 1984년 극락전도 재건하는 등 지속적인 불사를 하여 1987년에 충현이 도량을 완성하였다.

대원사(大願寺)는 1966년 김선심화가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명지산에 창건한 사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 봉선사의 말사이며, 문화체육관광부 전통사찰 제107호로 지정되어 있다. 1966년 창건 후에 1969년 승려 청담이 주지로 오게 되었다. 주요 내력은 1982년 10세기에 만들어진 가평 대원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遮那佛坐像)을 석굴전(石窟展)으로 옮겼으며, 나한전(羅漢殿)을 건립하였다. 이후 2004년 주지 도일이 대웅전과 요사채를 중수하고, 2008년 대웅전 앞에 삼층석탑과 석등을 세워 현재의 가람을 완성하였다.

[승려]

1. 기화[1376년(우왕 2)~1433년(세종 15)]

기화(己和)는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승려로, 호는 득통(得通)·함허(涵虛)·무준(無準). 속명은 유수이(劉守伊)이다. 1396년(태조 5)에 관악산 의상암(義湘庵)으로 출가한 뒤, 양주(楊州) 회암사(檜巖寺)를 거쳐 도를 깨달았다. 1410년(태종 10) 천마산 관음굴(觀音窟)과 불희사(佛禧寺)에서 주지를 하였으며, 1411년(태종 11) 가평 현등사를 중창하였다. 1414년(태종 14) 자모산 연봉사(烟峯寺)에 함허당(涵虛堂)을 마련하여 설법을 하며 지냈으며, 1420년(세종 2) 오대산에서 수행을 하였다. 오대산에서 지낼 때 꿈에 신령스러운 승려가 나와 이름을 ‘기화’, 호를 ‘득통’으로 지어줘, 직접 이름으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1433년(세종 15) 입적을 앞두고 “눈을 떠보니 시방[十方]이 벽락(碧落) 하나 없는 데도 길이 있어 서방극락이다”라는 말을 남기었다. 기화의 부도가 현등사에 전해지며, 선승이면서도 교학(敎學)에 대한 글을 많이 남겼다. 도교에도 능통하여 삼교일치(三敎一致)라는 평을 듣고 있다.

2. 보우[1301년(충렬왕 27)~1382년(우왕 8)]

보우(普愚)는 고려 말의 승려로, 호는 태고(太古), 시호는 원증(圓證)이며, 속성은 홍씨(洪氏)로 본관은 홍주(洪州)이다. 1301년(충렬왕 27) 9월 21일 현재의 가평군 설악면 설곡리에서 출생하였다. 1314년(충숙왕 원년) 양주 회암사로 출가하여 광지(廣智)의 제자로 있었고, 가지산(迦智山)에서 수행하여 1327년(충숙왕 14)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하였다. 1337년(충숙왕 후 6) 불각사(佛脚寺)에서 무자화두(無字話頭)에 대해 연구하였고, 1341년(충혜왕 복위 2) 태고암(太古庵)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1346년(충목왕 2) 원나라 연경(燕京) 대관사(大觀寺)와 호주(湖州) 천호암(天湖庵)을 거쳐 석옥(石屋)에게 임제종을 배우고, 「태고암가」의 발문과 가사(袈裟)를 받았다. 1348년(충목왕 4) 고려로 돌아와 어머니의 고향이었던 현재의 가평 지역인 광주(廣州) 소설암(小雪庵)에 머무렸으며, 왕사(王師)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1356년(공민왕 5) 왕사로 다시 책봉되었으며, 공민왕은 소설암이 있던 미원장(迷原莊)을 양근군(楊根郡) 미원현(迷原縣)으로 승격시켰다. 보우는 이를 거절하고 가지산 보림사(寶林寺)에 머무르며 신돈(辛旽)을 경계하라는 글을 올렸다가 1368년(공민왕 17) 속리사(俗離寺)에 감금되었다. 신돈이 죽은 뒤 보우를 국사(國師)로 책봉하고 개성 영원사(瑩源寺)에 머물도록 하였으나 보우는 거절하였다. 1371년(우왕 1) 왕명으로 영원사에 있다가 양산사(陽山寺) 즉, 희양산 봉암사(鳳巖寺)로 옮기었다. 1382년(우왕 8) 다시 소설암으로 와서 ‘인생은 물거품같이 허무하고 팔십여 년이 춘몽이다. 임종에 가서야 이제 가죽끈을 풀으니 둥글고 붉은 해가 서산을 넘는구나[人生命若水疱空 八十餘年春夢中 臨終如今放皮袋 一輪紅日下西峰]’는 게송을 남긴 뒤 입적하였다.

[관련 문화재]

1. 보물 제1793호 가평 현등사 동종:

조선 후기 범종이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 활동한 사인(思印)과 같은 주종장(鑄鍾匠)이 만든 것과 달리, 가평 현등사 동종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활동하던 천보(天寶)가 1619년(광해군 11)에 제작하였다. 종의 윗부분 천판(天板)이 둥글고 중앙 배 부분에 있는 세 줄의 선이 있으며, 하대(下帶)에 베풀어진 파도무늬는 전형적인 조선 전기 왕실발원(王室發願)의 종과 비슷하다. 원래 소장처가 왕실 원찰이었던 본사 봉선사였던 것을 미루어 볼 때, 조선 전기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3호 현등사 삼층석탑:

조선 전기 불탑 중 남아 있는 수량이 적은 것 중 하나이다. 1470년(성종 원년) 세종의 아들 영응대군의 부인과 딸, 사위가 석탑을 중수할 때 사리를 납입하였다는 기록이 사리함과 발견되었고, 1411년(태종 11) 태종의 원찰이었던 사실과 맞물려 원탑(願塔)으로 추정된다.

3.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4호 현등사 청동지장보살좌상:

보살상 바닥면에 소원하는 내용을 담은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이 음각되어 내력을 알 수 있다. 1790년(정조 14) 5월 ‘경기 가평 서령 운악산 현등사 지장암(京畿 加平 西嶺 雲岳山 懸燈寺 地藏庵)’에 모셔지기 위해 만들어졌고, 당시 주로 불화를 그렸던 설훈(雪訓)이 제작한 유일한 예이다.

4.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9호 현등사 함허당득통탑 및 석등:

1411년(태종 11) 현등사를 마지막으로 중창했던 함허대사 기화의 부도탑과 석등이다. 1433년(세종 15) 함허대사가 입적한 후에 만들어졌으며, 이 시기에 불교계가 위축되면서 승탑 건립도 제한이 많았는데 함허대사는 왕실의 예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함허대사의 승탑은 현등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봉암사(鳳巖寺), 정수사(淨水寺), 연봉사(烟峯寺) 등에도 있다. 사리를 나누어 탑을 세운 것으로 각 승탑의 모습은 다르지만, 고려 말에 분사리를 하여 탑을 세우는 전통이 조선 초에도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현등사 승탑은 앞에 석등이 동반되는 것도 시기를 대표하는 특징으로 본다.

5.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8호 가평 대원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통견(通肩)에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으며, 동그란 얼굴에 아담한 신체를 갖추어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