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11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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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池洞里竹洞洞祭 |
영어공식명칭 | Jukdong Dongje of Jidong-ri(Ritual)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제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지동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중휘 |
의례 장소 | 당집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지동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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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동제 |
의례 시기/일시 | 매년 정월 14일 밤 |
신당/신체 | 당집|제당/여성황 |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지동리 죽동마을에서 마을의 평안을 위해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지동리 죽동 동제는 정월 열나흗날 밤, 마을 전방에 있는 당집에서 이루어진다. 과거에는 당집에 금성대군의 혈석을 모시고 있었으며, 당나무와 마철장군에게 제를 올리기도 했다.
[연원 및 변천]
영주시 순흥면 지동리의 죽동마을에서 동제를 지내기 시작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과거 죽동마을의 당집은 지금은 ‘서낭배미’라고 부르는 곳에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 권씨 성을 쓰는 찰방 관직에 있던 사람이 그곳이 명당임을 알고 모친의 묘를 써서 지금 자리로 옮겼다는 전설이 있다.
예전에는 당집에 당신으로 금성대군의 혈석을 모시고 있었지만 혈석을 두레골로 옮기고 지금은 그 신의 부인인 여성황이 남아 있어 모시고 있다.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과거 권씨 부인이라는 사람의 꿈에 금성대군이 현몽하여 혈석이 있는 곳을 알려줘 그 돌을 찾아서 지금 당집을 짓고 모셨다고 한다. 이후 1930년대에 일본인들에 의해 부정됨을 당하였는데, 그 이후 이선달이라는 사람의 꿈에 금성대군이 현몽하였다고 한다. 이때 금성대군이 더는 모욕을 참을 수 없으니 나를 예전에 조카를 만나러 가던 길로 옮겨 달라고 해서 지금 두레골로 모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1980년대에는 마을 어른들에 의해 동제가 중단되었으나 마을 청년회가 그 뒤를 이어 3년 정도 약식으로 제를 지냄으로써 지동리 죽동 동제를 전승하였다고 한다. 또한, 20년 전쯤에는 당나무와 마철장군이 있는 바위에서도 제를 지냈으나 현재는 행하지 않는다.
[신당/신체의 형태]
죽동마을의 당집은 마을 전방에 있는 인삼밭 중간에 남서향으로 있다. 당의 형태는 한 평[약 3.3㎡] 남짓한 건물이고 지붕은 맞배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전면부에 문은 없고 출입구만이 나 있는 형태이다. 모시고 있는 신체는 두레골로 혈석을 옮겨간 이후에는 한지를 우측 벽에 흰 무명실로 묶어 놓은 형태로 남아 있다. 당집 이외에도 당나무와 마철장군이라 불리며 모셔지던 바위가 있어서 그곳에서도 제를 지냈었지만 1990년대 초 농지정리를 하면서 땅 주인에 의해 전소되어 지금은 당집만 남아 있다.
[절차]
지동리 죽동 동제는 정월 열나흗날 밤에 지낸다. 제를 지내기 사흘 전에 모여서 제관과 화주를 선출한다. 선출은 순번제로 이루어지나 순번이 돌아온 사람에게 부정이 있으면 다음번의 순번에 제관의 역할이 돌아간다. 예전에는 그해에 부정이 없는 사람을 선출하여 제관으로 삼았지만 1980년대 후반 마을의 어르신들이 동제를 그만 모신다고 한 후, 마을 청년회가 모신 뒤 지금의 순번제가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제관을 뽑은 뒤에는 당집을 청소하고 왼 새끼를 꼰 금줄을 건다. 제관의 집에도 금줄을 걸고 소나무 가지를 잘라다 꽂는다. 당집과 제관의 집 사이에는 황토를 뿌린다. 이는 부정을 막는다는 의미이다. 제관으로 선출된 사람에게는 금기가 요구된다. 부정한 것을 보지 않고 접하지 말아야 하며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금해야 한다. 마을에 초상이 난 경우에는 그해의 제사는 생략하고 다음 해에 고사를 지낸다고 한다.
제물은 제사 당일 아침 화주와 제관이 아침에 장을 보러 가 마을 공동 기금으로 산다. 제물을 마련할 때는 사람들을 많이 마주치지 않도록 택시를 이용하며, 장에 가서도 제물의 가격을 흥정하지 않고, 부정한 일이나 사람을 대하지 않으려 조심한다. 제물을 산 이후에는 화주의 집에서 이를 손질하고 음식을 장만한다. 제물의 종류는 삼실과, 삼채, 포, 청어, 메와 국, 술 등이다. 삼실과 같은 경우는 꼭 올리지만 삼채의 경우는 굳이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때에 따라서 더 올리고 덜 올릴 때도 있다고 한다. 제물을 마련할 때 ‘치’자가 들어가는 고기를 제물로 사용하지 않는다거나, 육고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제물을 조리함에서는 조리과정에 고춧가루를 사용하지 않으며, 청어는 굽지 않고 날것을 사용한다. 스스로 조심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한다. 제물을 올리는 제기의 경우는 따로 동네에 마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제관으로 선출된 사람 집의 제기를 사용한다.
정월 14일 밤이 되면 제관은 제물을 담아 들고 길가에 뿌려놓은 황토를 따라 당집까지 걸어간다. 상을 놓을 공간이 없어 당집 안 바닥에 한지를 깔고 그곳에 제물을 진설한다. 제물의 진설이 끝나면 제관이 술잔을 드리고 절을 한다. 잔은 제관이 한번 올리고 절을 두 번 하는 것으로 제를 마친다. 이렇게 제를 지내고 나면 소지를 올리기 시작하는데 제관과 화주의 경우는 식구들 모두의 소지를 올리고 그 밖의 마을 사람들의 경우는 대주의 소지만을 올린다. 그 밖에도 마을을 떠나 읍에 나가 있는 사람이나 학생, 군인들의 소지도 함께 올려주고 우마 소지라 하여 가축들을 위해서도 소지를 올려주는데, 농기계를 사용하고 나서부터는 농기계로 인해 사고가 일어나지 말라고 하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20년 전에는 당집에서 제의가 모두 끝나고 나면 당집에서 조금 떨어져 있던 당나무에 가서 당나무와 마철장군이라고 불리는 바위에 제를 지냈다고 한다. 마철장군은 예전에 죽동이 역(驛)이었을 때 마을을 지키고 역에서 기르고 있던 말들의 건강과 보호를 위해서 모시던 장군이라고 한다. 제의 절차는 금줄을 두르고 조밥을 세 그릇을 장만하며 “마철장군 무슨 동네를 잘 지켜주시오”라는 간단한 주언을 외우는 것이 제의 전부였다고 한다. 조밥 세 그릇을 올리는 의미는 당나무가 세 그루 있었기 때문에 조밥을 세 그릇을 해서 올리는 것이라고 한다. 제의 절차가 모두 끝나면 정월 대보름 아침 회관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음복한다. 음복할 때는 동회를 열어 여러 가지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고 한 해의 계획을 세운다. 동회가 끝나고 나면 마을 사람들끼리 윷놀이를 하면서 친목을 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