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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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鳳翼 |
영어공식명칭 | An Bong-i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출생 시기/일시 | 1896년 - 안봉익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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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안봉익 편항정터 만세시위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안봉익 징역 2년 선고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안봉익 항소 기각 및 투옥 |
몰년 시기/일시 | 1951년 - 안봉익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3년 - 안봉익 대통령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안봉익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안봉익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
거주|이주지 | 안봉익 거주지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세장리 |
활동지 | 안봉익 활동지 -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중평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안봉익(安鳳翼)[1896~1951]은 1919년 3월 21일 경상북도 안동의 편항장터에서 열린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의 옥고를 치렀다.
[가계]
안봉익의 본적지는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인데, 3.1운동 당시에는 청송군 진보면 세장동에서 살고 있었다.
[활동 사항]
안봉익은 1919년 3월 다른 지역에서 만세시위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으나, 청송 지역에서는 만세시위운동의 조짐이 없자 이웃한 안동군 임동면 중평동 편항장터에서 열린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편항장터 만세시위운동은 1919년 3월 15일 류연성(柳淵成)[1857~1919]·류동수(柳東洙)[1898~1983]·이강욱(李康郁)[1874~1945]·홍명성(洪明聖)·박재식(朴載植)[1888~1927]·류교희(柳敎熙)[1886~1965]·박진선(朴晋先)[1877~1930]·류곡란(柳谷蘭) 등이 편항장터 타작장에 모여 의논함으로써 계획되었다. 이들은 1919년 3월 21일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군중 동원 등 사전 준비를 진행하였다. 안봉익은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듣고 3월 21일 오후 2시 편항장터로 나가 모여든 군중 1천여 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참가하였다.
안봉익은 임동주재소에서 출동한 2명의 경찰이 주동자들을 체포하려 하자 이들에게 달려들어 물러가게 하고, 군중과 함께 임동주재소로 들어가 기물과 서류를 파괴하였다.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소지한 총검과 주재소 내의 총·칼·탄환·제복 등을 거두어 그곳 우물 속에 버렸다. 이때 주재소에 있던 2명의 경찰이 겁을 먹고 도주하자 안봉익은 시위 군중과 함께 경찰 사택을 파괴한 뒤 오후 5시경에는 면사무소로 들어가 건물을 부수고 문서류도 파기하였다. 안봉익은 군중들과 함께 1919년 3월 22일 새벽 3시경에 해산하였다.
안봉익은 도주했던 경찰들의 급보를 받고 출동한 안동경찰서 경찰 및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22일 오전 5시 무렵 여러 주동자와 함께 체포되었고, 5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안봉익은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8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형 확정으로 징역 2년형의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안봉익은 198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