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91 |
---|---|
한자 | 金鍾鎭 |
영어공식명칭 | Kim Jong-ji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출생 시기/일시 | 1904년 9월 15일 - 김종진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10월 5일 - 김종진 영주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 조직 및 적농부 위원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952년 1월 28일 - 김종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1년 - 김종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김종진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
거주|이주지 | 김종진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
활동지 | 김종진 활동지 - 경상북도 영주시 |
활동지 | 김종진 활동지 - 경상북도 안동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영주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 적농부 위원 |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종진(金鍾鎭)[1904~1952]은 1920년대 안동 지역에서 안동청년동맹 활동을 하였고, 1932년에는 영주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 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가계]
김종진은 1904년 9월 15일 지금의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김종진은 영주 출신이지만, 1920년대에는 안동청년동맹 와룡지부와 신간회 안동지회에서 활동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1930년 영주 지역에서 전개된 격문 투쟁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하였다. 1932년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이 일제의 주요 인사 검거로 좌절되자, 김종진은 이것의 재건을 구상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1932년 9월 무렵 안동의 사회운동가 안상윤(安相潤)[1911~1949]이 일제의 검거를 피해 영주군 평은면 수도리[지금의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 숨어들었다. 이에 김종진은 김명진(金命鎭)[1908~1955]·박찬상·김용진 등과 함께 안상윤을 찾아가 영주 지역의 사회운동 상황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때 안상윤은 “영주 운동의 소장(消長)이 남아 있는 여러분의 활동 여하에 달려 있으니, 수도리를 중심으로 소수라도 재건 조직을 도모하자”라고 제안하였다. 김종진 등은 안상윤의 제안에 동의하고 재건 조직을 만들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0월 5일 영주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김종진은 적농부 위원, 김명진은 반제부 위원, 안상윤은 책임자를 각각 맡았다.
1932년 10월 6일 안상윤이 안동으로 돌아간 뒤 김종진은 김명진과 함께 독서회를 꾸준하게 진행함으로써 마르크스 이론을 습득하였으며, 1932년 11월 17일 러시아혁명일에는 기념행사를 거행하기도 했다. 김종진은 1932년 12월 7일 영주청년동맹과 신간회 영주지회에서 활동하던 집안사람 김계진(金季鎭)[1907~2000]과 함께 혁명적농민조합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1933년 5월 혁명적농민조합은 메이데이를 맞아 봉화의 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와 함께 연대투쟁을 전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사전에 일제 관헌에 발각됨으로써, 계획은 무너지고 조직은 와해하고 말았다. 체포된 김명진은 1934년 7월 2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의 재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김종진은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6년 2월 19일에 가출옥하였다.
[상훈과 추모]
김종진은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