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787
한자 權泰東
영어공식명칭 Gwon Tae-do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2년연표보기 - 권태동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6년 3월 - 권태동 영주공립보통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26년 - 권태동 경성제2공립고등보통학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29년 12월 - 권태동 경성제2공립고등보통학교 동맹휴교 촉구
활동 시기/일시 1932년 4월 - 권태동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62년 7월 3일연표보기 - 권태동 사망
출생지 권태동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권태동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영주공립보통학교 - 경상북도 영주시
학교|수학지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활동지 권태동 활동지 - 경상북도 영주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 참여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권태동(權泰東)[1912~1962]은 1929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에서 일제의 교육정책에 반대하는 동맹휴교 투쟁을 벌였으며, 1932년에는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가계]

권태동은 1912년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권태동은 1926년 3월 영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곧 경성제2공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29년 12월 4일 경성제2공립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고무되어 「조선어의 문법 및 역사를 교수하라」 등의 요구사항을 담은 격문을 작성하였다. 1929년 12월 5일 학교 강당에 집합한 300여 명의 학생 앞에서 격문을 낭독하고, 동맹휴교를 단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는 1922년 2월 제2차 조선교육령을 통해 일본어와 일본 역사 교육 강화해 나가던 식민지 교육정책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 사건으로 권태동은 퇴학처분을 받고, 일제 관헌에 체포되었다. 1930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아 징역 8월에 집행유예 4년을 언도받았다. 이 사건에 대해 일제는 ‘학생혁명당’, ‘학생전위동맹’, ‘학생만세사건’ 등으로 명명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권태동은 1932년 3월 영주에서 박병성(朴炳星)[1904~?]의 추천으로 1931년 9월부터 진행되고 있던 농민운동과 반제동맹 조직 준비모임에 참석하였다. 1932년 4월 준비모임은 비밀결사인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직하고, 혁명적농민조합과 반제동맹 결성을 추진하였다. 이때 권태동박병성과 함께 반제동맹을 맡았는데, 훗날 권태동은 반제동맹의 목적이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고 동시에 조선혁명의 현 단계인 농업혁명을 실현하는 데 있다”라고 언급하였다. 그런 가운데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는 이것이 일본제국주의 몰락의 시작이라고 확신하면서, ‘출병 반대’, ‘제국주의 전쟁 반대’, ‘소비에트 러시아 사수’, ‘중국혁명 지지’ 등을 강조해 나갔다.

1932년 7월경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의 활동을 예의주시하던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과 형사와 영주경찰서 및 봉화경찰서 경찰에 의해 권태동 등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1932년 9월 19일 권태동 등 12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예심에 회부되고, 34명은 기소유예 처분, 나머지는 기소중지 내지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1933년 12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언도받았다. 또 이전의 집행유예가 취소되고, 징역 8월이 추가 집행되어 전체 징역 3년 2월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상훈과 추모]

권태동은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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