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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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海鵬 |
영어공식명칭 | Jeong Hae-bu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924년 - 정해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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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41년 - 정해붕 안동농림학교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43년 - 정해붕 대한독립회복연구단 결성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 정해붕 체포 및 투옥 |
몰년 시기/일시 | 1991년 - 정해붕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5년 - 정해붕 대통령표창 추서 |
출생지 | 정해붕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48 |
거주|이주지 | 정해붕 거주지 -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구산리 |
학교|수학지 | 안동농림학교 - 경상북도 안동시 |
활동지 | 정해붕 활동지 - 경상북도 안동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대한독립회복연구단 단원 |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정해붕(鄭海鵬)[1924~1991]은 안동농림학교 제8·9·10회 학생들을 중심으로 1944년 10월 조직된 대한독립회복연구단의 단원으로 1945년 2월 27일 무장봉기를 결행할 계획을 세우고 자금 조달과 동지 규합에 진력하다가, 1945년 3월 10일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가계]
정해붕은 1924년 12월 9일 영주군 영주면 영주리에서 태어나 청송군 현서면 구산리에서 거주하였다.
[활동 사항]
정해붕은 1941년 3월 안동농림학교 제9기로 입학하였다. 1943년 여름방학 동안 농촌의 실태를 조사한다는 명분 아래 송탄유(松炭油)의 원료가 되는 관목을 채취하는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던 8·9기생 권영동(權寧東)[1928~1997]·고제하(高濟夏)[1927~1950]·서정인(徐正寅)[1927~?] 등과 함께 일제가 패망할 것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일본의 군인으로 전쟁에 끌려가 헛되이 죽기보다는 대책을 마련하자는 결의를 하였다.
1944년 10월 일제가 학생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수업 연한을 단축하여 졸업반의 졸업일을 앞당기자 이에 대응하여 1944년 11월 안동농림학교 제8·9·10회 학생들은 비밀결사 대한독립회복연구단을 결성하였다. 당시 대한독립회복연구단은 참모부·교화부·신풍부·특공부·의무부·대외연락부 등을 설치하고 단원을 확대하여 조직 기반을 강화해나갔다.
대한독립회복연구단의 정해붕 등은 명성회 회원들과 연합하여 1945년 2월 27일 무장봉기를 결행할 계획을 세웠다. 명성회는 1943년 4월 안동농림학교 제9기생 김한룡(金漢龍)[1927~1998]·권오봉(權五鳳)[1930~1999]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그러나 자금을 조달하고 동지를 규합하던 중 경찰에 발각되어 계획을 변경하여 1945년 3월 10일 소위 일본 육군 기념일에 총궐기하기로 다시 계획을 수립하였다. 정해붕 등은 무장봉기를 위해 안동농림학교 무기고에 있는 총으로 안동경찰서와 안동헌병파견대를 기습 공격하여 점령하고, 나아가 철도와 통신망을 파괴한 후 의성으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0기생인 강형원·현필기 등이 순찰 중이던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가택수색에서 대한독립회복연구단의 단원 명부가 발견되어 전원 체포되었다.
정해붕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며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월 16일 대구지방검찰청 안동지청에서 기소유예로 출옥하였다.
[상훈과 추모]
정해붕은 2005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