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765
한자 朴泰陽
영어공식명칭 Park Tae-yang
이칭/별칭 이택민(李澤民),이동인(李同人)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4년 2월 4일연표보기 - 박태양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34년 - 박태양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 한국인 훈련반 수학
활동 시기/일시 1936년 - 박태양 조선민족혁명당 가입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0년대 - 박태양 독립혁명당 가입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5년 - 박태양 육군사관학교 3기생 졸업
몰년 시기/일시 1965년 12월 17일연표보기 - 박태양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0년연표보기 - 박태양 건국포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박태양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박태양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산법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박태양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산법리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국인 훈련반 - 중국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조선민족혁명당 당원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박태양(朴泰陽)[1914~1965]은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洛陽分校] 한국인 훈련반에서 특수임무 수행 교육을 받았으며,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애국장정 모집과 일본인 암살, 군사 기밀 탐지 등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가계]

박태양의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이택민(李澤民)·이동인(李同人) 등의 다른 이름을 쓰기도 했다. 1914년 2월 4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산법리에서 박제선(朴齊璿)[1878~1938]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제선대동상점사건의 주도자였으며, 형 박진양(朴震陽)[1909~1940]도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활동 사항]

박태양은 1919년 3.1운동 이후 아버지 박제선을 따라 형 박진양과 함께 중국 지린[吉林]으로 갔다. 형 박진양은 1923년 국민군 제2군 학생대에서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박제선은 1924년 베이징[北京]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박태양은 1934년 봄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 한국인 훈련반에 입교하여, 특수임무 수행교육을 받고 1935년 4월 졸업하였다.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 제2중대 육군군관 훈련반 제17대인 한인특별반은 1934년 2월부터 한국인 100여 명으로 운영되었으며, 교육 목표는 “일본제국주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노동자·농민을 지휘할 수 있는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는 것”이었고, 입교생의 사명은 “일제의 대륙침략정책이 세계대전으로 발전할 때 일본 본토와 대륙의 교량 역할을 하는 한국 및 남만주 지방의 일본군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침략 원흉을 제거하며, 노동자·농민 대중의 지휘 및 중국군과의 연합을 통해 한국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박태양은 형 박진양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애국장정 모집, 일본인 암살, 군사 기밀 탐지 등의 임무를 띠고, 북지(北支) 및 만주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1936년 3월 공산당원의 혐의를 받고 홍종민(洪鍾民)[1913~?]·윤여복(尹汝福)[1918~1950]·박난교(朴煖敎) 등 4명의 동지와 함께 중국 관헌인 보정공안국에 체포되었다. 결국, 일경에게 인도되어 1936년 12월 14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에 집행유예 4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박태양은 출옥 후에 다시 독립혁명당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45년 광복 후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 3기생으로 졸업한 뒤 6.25전쟁에 참전하였다. 1965년 12월 17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박태양은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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