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33 |
---|---|
한자 | 李賢求 |
영어공식명칭 | Lee Hyeon-gu |
이칭/별칭 | 희겸(希謙),혜인(兮人)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62년 - 이현구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896년 - 이현구 선성의진 참여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40년 - 이현구 창씨개명 항거 |
몰년 시기/일시 | 1940년 - 이현구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이현구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이현구 출생지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 |
거주|이주지 | 이현구 이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유전리 |
거주|이주지 | 이현구 이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안정면 생현리 |
활동지 | 이현구 활동지 - 경상북도 영주시 안정면 생현리 |
묘소 | 이현구 묘소 -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유전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정의]
개항기 영주 지역에 정착한 의병.
[개설]
이현구(李賢求)[1862~1940]는 을미의병기 선성의진(宣城義陣)에 참여하였으며, 일제강점기 때에는 창씨개명에 항거하여 단식을 진행하다 순국하였다.
[가계]
이현구의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희겸(希謙), 호는 혜인(兮人)이다. 이황(李滉)[1501~1570]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명호(李命鎬), 어머니는 권연하(權璉夏)[1813~1896]의 딸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1862년 8월 25일 경상도 예안현 의동면 교동(校洞)[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이현구는 어린 시절 큰형 이선구(李善求)[1856~1922]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이어, 1895년 11월 단발령이 공포되자 전국 각지에서 이른바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이 무렵 안동 일대에서도 의병 봉기를 촉구하는 통문이 돌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예안통문이 돌면서, 1896년 1월 선성의진이 결성되었는데, 대장은 이만도(李晩燾)[1842~1910], 부장은 이중린(李中麟)[1838~1917], 선봉장은 이인화(李仁和)[1858~1929]가 맡았다. 이때 이현구도 서기를 맡은 이선구와 함께 적극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현구는 1899년 풍기군 봉현면 이전리(泥田里)[지금의 영주시 봉현면 유전리]로 거주지를 옮겼으며, 한동안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1910년 9월 이만도가 단식 끝에 순절하자,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폐양립(蔽陽笠)을 쓰고 죄인을 자처하며 은둔생활을 하였다. 1934년 영주군 안정면 생현리로 이주한 후, 안상봉(安相鳳)·황영래(黃永來)[1897~1922]·김동진(金東鎭)[1867~1952]·황영조(黃永祖) 등 영주 지역 유생들과 도의(道義)로 교유하였다. 1940년 일제의 창씨개명에 항거하여 단식·순국하였다.
[저술 및 작품]
이현구의 문집으로 『혜인집(兮仁集)』이 전한다.
[묘소]
이현구의 묘소는 영주시 봉현면 유전리 천부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현구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1945년 11월 7일 각처 유림 500여 명이 생현계(栍峴稧)를 창립하여 순절기념사업을 추진하였다. 1970년 9월 1일 혜인이현구선생순절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영주시 안정면 생현리에 ‘혜인이현구선생순절비(兮仁李賢求先生殉節碑)’와 비각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