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휘정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725
한자 金輝珽
영어공식명칭 Kim Hwi-jeong
이칭/별칭 정옥(廷玉)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41년연표보기 - 김휘정 출생
관련 사건 시기/일시 1895년 - 김휘정 을미의병
활동 시기/일시 1896년 - 김휘정 창의
활동 시기/일시 1896년 - 김휘정 이강년 의진과 연합
몰년 시기/일시 1901년연표보기 - 김휘정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5년연표보기 - 김휘정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김휘정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상석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김휘정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상석리 지도보기
성격 의병
성별

[정의]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개설]

김휘정(金輝珽)[1841~1901]은 1896년 순흥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이강년 의진(李康秊義陣)과 연합부대를 형성하여 항전하였다.

[가계]

김휘정의 본관은 예안(禮安)[선성(宣城)], 자는 정옥(廷玉)이다. 1841년 경상도 순흥도호부 도탄(桃灘)[지금의 영주시 부석면 상석리]에서 김낙표(金樂驃)의 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김휘정은 1895년 8월 일제가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했다는 변보를 전해 듣고 비분강개하고 있었는데, 곧이어 일제와 친일정권에 의해 단발령과 복제 개혁까지 강행되자, 토역복수(討逆復讐)의 기치 아래 고향인 순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김휘정은 순흥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이강년 의진과 연합부대를 형성하여 항전하였다. 1896년 5월 국왕 고종이 치유를 내려 의병의 해산을 종용하였고, 곧이어 의병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김휘정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김휘정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험한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자신을 체포하러 온 관군에 맞서 항전을 지속하였다.

이때 김휘정의 아들 김건규(金建奎)가 자청하여 잡혀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유인석(柳麟錫)[1842~1915]은 글을 보내어 위문하기를 “아버지는 나라를 위하여 천고의 대의를 일으키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하여 죽음을 대신하였으니, 이는 효도에 죽도 또 대의에 죽은 것이라. 모두 천하 후세에 길이 칭찬받을 일이다”라고 하였으며, 함께 항전하였던 이강년도 사람을 보내 위문하였다. 이에 김휘정은 족친 김영시(金永詩)를 보내 답례하였다. 을미의병 해산 이후 김휘정은 전쟁터에서 얻은 부상과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 때문에 병이 들었고, 결국 1901년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김휘정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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