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605
한자 金澤龍
영어공식명칭 Kim Taek-ryong
이칭/별칭 시보(施普),와운자(臥雲子),조성당(操省堂)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수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47년연표보기 - 김택룡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77년 - 김택룡 생원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88년 - 김택룡 식년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김택룡 의병 창의
활동 시기/일시 1595년 - 김택룡 사간원헌납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97년 - 김택룡 성균관사예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00년 - 김택룡 진주제독 차출
활동 시기/일시 1601년 - 김택룡 영남경차관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04년 - 김택룡 강원도도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06년 - 김택룡 선무원종공신 2등 녹훈
활동 시기/일시 1606년 - 김택룡 청난원종공신 1등 녹훈
활동 시기/일시 1607년 - 김택룡 전라도도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08년 - 김택룡 영월군수 부임
몰년 시기/일시 1627년연표보기 - 김택룡 사망
거주|이주지 김택룡 거주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
거주|이주지 김택룡 거주지 -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태곡리
부임|활동지 김택룡 부임지 - 경상북도 안동시
부임|활동지 김택룡 부임지 - 강원도 영월군
묘소|단소 김택룡 묘소 -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의성(義城)
대표 관직 경릉참봉|강원도도사|영월군수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지역에 거주했던 문신.

[개설]

김택룡(金澤龍)[1547~1627]은 경릉참봉·강원도도사·영월군수 등을 지낸 문신이다. 이황(李滉)[1501~1570]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도산서원 원장을 오랫동안 지냈다.

[가계]

김택룡의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시보(施普), 호는 와운자(臥雲子)·조성당(操省堂)이다. 아버지는 덕릉참봉을 지낸 김양진(金楊震), 어머니는 내금위 김여광(金礪光)의 딸 숙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 할아버지는 호군을 지낸 김몽석(金夢石), 증조할아버지는 부사과를 지낸 김숭조(金崇祖)이다. 부인은 참봉을 지낸 이사의(李思義)의 딸 공인 고양이씨(高陽李氏)와 이의강(李義綱)의 딸 공인 진성이씨(眞城李氏)이다.

김택룡 가문의 세거지는 선대부터 경상도 예안현 한곡(寒谷)[지금의 안동시 예안면 태곡리 일대]이지만,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에 따르면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수민단(壽民丹)[지금의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 옛 순흥도호부 지역]에도 ‘산장(山庄)’이라 부르던 별업(別業)을 조성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김택룡은 수시로 산장을 오가며 영천군수(榮川郡守) 및 지역의 유력 인사들과 교유하였고, 젊은 유생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활동 사항]

김택룡은 8세 때 조목(趙穆)[1524~1606]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성장해서는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권우(權宇)[1552~1590]와 막역한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성리설을 강론하였다. 1576년(선조 9) 생원시에 급제하였고, 이후 학행으로 경릉참봉에 천거되었다. 1588년(선조 21)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김택룡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면서 군무에 힘썼다. 9월에는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예안정제장으로 활약하였다. 1595년 사간원헌납으로 있으면서, 상차(上箚)를 올려 군무의 정비와 왕자가 보유하고 있던 노복들의 폐단을 진달하였다. 1597년(선조 30) 성균관사예에 제수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도원수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김택룡은 1600년(선조 33) 진주제독으로 차출되어 명나라 진영에서 군무를 보았고, 겨울에는 반료도감이 되어 교동에서 명나라군을 도왔다. 1601년 안집사 김륵(金玏)[1540~1616]은 김택룡을 영남경차관으로 천거하였다. 전란으로 전야(田野)가 크게 황폐하고 많은 사람이 흩어졌는데, 김택룡의 노력으로 전후 복구가 원활하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어 공조정랑과 울산판관을 거쳐 1604년에는 강원도도사에 제수되었다.

김택룡은 1607년(선조 40)에는 전라도도사, 1608년(광해군 즉위)에는 군기시정을 거쳐 영월군수로 부임하였다. 영월군의 노산군(魯山君)[단종(端宗)] 무덤은 금몽암(禁夢庵)의 승려들이 수호했는데, 전란으로 암자가 불타고 사람들은 모두 죽어 황폐해진 상태였다. 이에 김택룡은 승려 몇 명을 모아 노릉암(魯陵庵)을 짓고 무덤을 수호케 하였다.

광해군 즉위 이후 대북 세력이 권력을 잡자 고향으로 내려왔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鄭仁弘)[1535~1623]이 문묘에 종사된 이언적(李彦迪)[1491~1553]과 이황을 극렬히 배척하자, 도내 사림들에게 통문을 보내 김령(金坽)[1577~1641]과 함께 변무하는 상소문을 진행하였다. 도산서원 원장을 오랫동안 역임하면서 학문진흥에 힘썼다. 1615년에는 여강서원(廬江書院)과 이산서원(伊山書院)[영주시 이산면 원리]의 원생들을 모아 조목의 도산서원 추향을 주도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택룡의 문집으로 4권 2책의 『조성당집(操省堂集)』이 전한다. 『조성당집』에는 임진왜란 당시 우국충정을 노래한 시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3권으로 된 일기를 남겼는데, 노년기인 1612년부터 1617년까지 기록이다. 일기는 2010년 『조성당일기』란 제목으로 한국국학진흥원에서 국역 간행하였다.

[묘소]

김택룡의 묘소는 안동시 예안면 가동(檟洞)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택룡은 1606년 선무원종공신 2등, 청난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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