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4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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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順興斥和碑 |
영어공식명칭 | Sunheung Anti-foreign Stele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순흥로 67[읍내리 314-3]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태환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820년 - 흥선대원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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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시기/일시 | 1871년 - 순흥척화비 건립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898년 - 흥선대원군 사망 |
이전 시기/일시 | 1990년 - 순흥척화비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314-3에서 읍내리 378-2로 이전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1년 5월 14일 - 순흥척화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2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순흥척화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
현 소재지 | 순흥척화비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순흥로 67[읍내리 314-3] |
원소재지 | 순흥척화비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순흥로 15[읍내리 378-2] |
성격 | 척화비 |
관련 인물 | 흥선대원군 |
재질 | 석재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비신 높이 120㎝|비신 폭 47㎝|비신 두께 14㎝ |
소유자 | 영주시 |
관리자 | 영주시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1871년 흥선대원군이 외세를 배척하고자 세운 비석.
[개설]
순흥척화비(順興斥和碑)는 1871년(고종 8) 4월 신미양요를 겪은 직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명에 따라 한양 종로를 비롯하여 전국 주요 도로변에 건립된 척화비 가운데 하나이다. 순흥척화비는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는 내용으로 1991년 5월 14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2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건립 경위]
1866년(고종 3)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겪은 흥선대원군은 서양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 서울 및 전국의 중요 도로변에 척화비를 세우게 하였는데, 순흥척화비도 그중 하나이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유배되었을 때, 일본 공사의 요구에 따라 전국의 척화비는 모두 철거되었다. 순흥척화비도 한때 땅속에 묻혔다. 1940년대 중반경 순흥척화비는 지금의 순흥초등학교 남쪽 편 길가에 다시 세워졌다. 이후 순흥초등학교 정문과 뒤뜰로 옮겨졌다가, 1990년 12월 순흥면사무소[현 순흥면행정복지센터]로 옮겨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위치]
순흥척화비는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에 소재한 순흥면행정복지센터 마당에 자리 잡고 있다.
[형태]
순흥척화비의 형태는 장방형이지만, 윗부분은 둥글게 반원형으로 처리해 놓았다. 순흥척화비는 잘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된 이중의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비신의 높이는 120㎝, 폭은 47㎝, 두께는 14㎝로 비교적 작은 편이다.
[금석문]
순흥척화비 비문은 ‘양이침범비전즉화주화매국(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이고,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개아만년자손병인작신미립(戒我萬年子孫丙寅作辛未立)[우리 만년자손에게 경계하도록 해야 한다. 병인년에 지어 신미년에 세우다.]’라고 새겨져 있다.
[의의와 평가]
순흥척화비는 서양 열강의 간섭을 배척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 의식을 고취하는 역사자료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