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3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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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夜學運動 |
영어공식명칭 | Yahak(Night School)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지역에서 전개된 교육 운동.
[개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조선인과 일본인 교육을 엄격히 차별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초등교육기관을 4년제와 6년제로 구분한 뒤, 조선인 초등교육기관은 대부분 4년제로 설립 인가하였다. 6년제 보통학교를 졸업해야 상급 교육기관인 중학교[오늘날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할 기회가 주어졌다. 이러한 차별을 통해 조선인의 교육 기회를 제한하였다. 조선인들은 이러한 일본의 식민교육에 대응하여 다양한 형태의 비인가 사립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영주 지역에서 전개된 야학운동도 그중 하나이다.
[영주 지역 야학운동의 특징]
영주 지역에서는 1909년부터 야학운동이 시작되었으며, 1920년대에 가장 활발하였다. 대표적인 야학 단체로는 1909년에 설립된 내매야학, 1920년대 설립된 기독교여자야학회·영흥노동야학회·금계노동야학·영주부녀야학·신암야학, 1930년대 설립된 농촌야학 등이 있다. 이들 야학은 영주 지역에서 민족교육·문맹 퇴치·계몽운동을 주도해 나갔는데, 그 유형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노동자·농민에게 문맹을 퇴치해 줄 목적으로 운영되던 야학들이다. 이들 야학은 농민과 노동자의 의식 개선을 끌어내, 농민·노동운동으로 견인하는 역할을 하였다. 두 번째는 여성에게 근대 교육을 제공하는 야학들이다. 세 번째는 영주 지역의 청년회, 동네 유지, 기독교 계열 단체 등이 설립한 야학들이다.
[노동야학]
1920년 8월 9일 영주군 영주면 가흥리에서 영흥노동야학회가 설립되었으며, 영주군 풍기면 금계동에서는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1923년 11월 18일 금계노동야학을 설립하였다. 영주군 이산면에 있던 영주청년동맹 이산지부는 1928년 8월 8일 신암야학을 설립했는데, 인근 농민들 40여 명이 교육을 받았다고 하며, 김낙영(金洛榮)·김익영(金益榮) 등이 교사로 활동하였다. 1939년에는 풍기면 백동의 김규하·장인환·이맹화 등 유지 청년들이 농촌야학을 설립하였다. 농촌야학 개설 당시 학생이 60여 명에 달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들은 철도공사장에 나가 벌어 온 돈으로 농촌야학을 운영하였다. 1940년 1월에는 학예회를 개최했는데, 풍기 읍내와 인근 마을 주민 약 1,300여 명이 참석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여성야학]
일제강점기 근대 교육의 혜택에서 소외되었던 집단 중 하나가 바로 여성이었다. 학교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여성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인식은 낮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1920년대 야학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면서, 여성 교육을 확대하고자 하는 노력이 펼쳐지게 된다. 이에 영주 지역에서는 1920년경 현 영주제일교회 내 기독교여자야학회, 1925년에는 영주공립보통학교 내에 영주부녀야학회가 설립되었다. 특히 1920년대 입학지원자의 급증으로 입학난을 겪고 있던 영주공립보통학교 교사가 자발적으로 영주부녀야학회를 세워, 근대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사실은 여러 면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기독교 계열 야학]
영주 지역의 기독교 계열은 이른 시기부터 야학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강백남(姜白南)은 평은면 천본리 내매마을에 야학을 설립하였는데, 이는 곧 1910년 설립된 기독내매학교의 기반이 된다. 이 무렵 내매야학에서는 오전 5시부터 6시까지 부녀자와 소녀들에게 초보적인 한글·산술·한자를, 8시부터 9시까지는 청년들을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