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1623
한자 崇明排淸-象徵-朝宗岩-大統廟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대보간선로 399[대보리 산176-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윤유석

[정의]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대보리에 있는 조종암대통묘를 중심으로 살펴본 조선 후기 존명 사상의 상징화와 제례화의 역사.

[개설]

조종암조종천이 흐르는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의 대보산 밑 도로변에 있는 글씨가 새겨진 암벽이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의 어필인 ‘사무사(思無邪)’, 선조의 어필인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 再造藩邦)’, 효종이 내린 글귀를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받아 쓴 ‘일모도원 지통재심(日暮途遠 至痛在心)’, 선조의 손자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의 친필인 ‘조종암(朝宗嵒)’ 등 22자가 새겨져 있다. 암벽에 글자를 새기자고 처음 제안한 사람은 전국을 다니며 은둔 생활을 하던 허격(許格)[1607~1691]이었다. 조종암에 글자가 새겨지고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이번에는 이항로(李恒老)[1792~1868]가 문하생들과 함께 찾아와 춘추 의리를 토대로 척양 척왜의 위정척사 사상을 다졌다. 또 이항로조종암을 찾았을 즈음, 서울에 살던 명나라 유민의 후손이 조종암 근처에 터를 잡고 명나라 태조와 유민을 기리는 사당을 세웠는데, 지금까지 대대로 제사가 이어져 오고 있다. 허격은 왜 산간벽지인 가평을 찾아 바위에 글자를 새겼고, 명나라의 후손들은 무슨 이유로 조종암에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일까?

[조종현을 천하의 건정지로 여긴 허격 ]

조종암은 1684년(숙종 10) 가평군수 이제두(李齊杜)[1626~1687]와 유생인 백해명(白海明)허격의 제안을 받아들여 만들어졌다. 허격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조정이 후금과 형제의 의를 맺은 것에 비분강개하여 산속에 은거한 바 있고, 1637년(인조 15)에도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스스로 ‘창해처사(滄海處士)’라 이름하고 은둔하였다. “천하에 산이 있어서 나는 이미 숨어 사는데, 온 지역 가운데 황제는 없거늘 그대는 어디에 조회(朝會)하는가?[天下有山吾巳遯 域中無帝予誰朝]”라는 허격의 시가 당대 선비들 사이에서 회자될 정도로, 오랑캐인 청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멸망하고 조선이 항복한 사건은 조선 선비들에게 충격적이고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허격은 전국을 떠돌다가 가평 조종현에 이르러 명나라 의종의 어필을 새기기로 결심하는데, 이유는 ‘조종(朝宗)’이라는 이름과 암벽 앞에 흐르는 조종천 때문이었다. ‘조종(朝宗)’은 여러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 모인다는 의미도 있지만, 원래는 제후가 천자를 알현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천자를 봄에 알현하는 것을 ‘조(朝)’, 여름에 알현하는 것을 ‘종(宗)’이라 한다. 조종천은 S자형으로 여러 번 굽이치다가 바다로 흘러들고 있어 조종천의 지형과 뜻이 그대로 숭명 사상을 담고 있었다. 조종암기실비에도 “일만 강류가 바다를 향하며 바다를 왕으로 삼고 있듯이 왕 된 자의 일은 제후의 조회를 받는 일보다 소중한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강한(江漢)이 동으로 흐르는 것을 일컬어 조종이라 하는데 …… 이 점이 바로 ‘조종암’이라고 이름 붙여진 연유이다. 바위는 가평에 있고 가평은 해동의 궁벽한 고을인데, 특히 조종은 마을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허격은 또 “이곳은 천하의 건정지(乾淨地)[굳세고 정결한 곳]이다. 지난날 임진·계사의 난리에 기자의 봉강을 통틀어 주리를 면하게 된 것은 황제의 힘이 아니었겠느냐? 아! 그러나 명의 사직은 무너지고 중원은 더러운 땅이 되어 우리들은 우모할 곳이 없었는데 다행히 여기에 얻었다.”라고 하였다. 조종현을 청나라 오랑캐의 눈을 피해 명나라 황제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삼은 것이다.

‘조종암 3현’이라 불리는 허격·이제두·백해명조종암에 글자를 새긴 뒤, 작은 단을 설치하고 명나라 숭정제의 기일인 3월 19일에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을 하였다. 특히 허격은 청나라 역법인 시헌력을 평생토록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춘추(春秋)』의 근본 사상인 ‘존중화 양이적(尊中華 攘夷狄)[중화를 높이고 이적을 물리친다]’ 의식을 철저히 하였다. 또 북벌을 추진하다 뜻을 이루지 못한 효종의 기일이 되면 고기를 먹지 않고 슬피 울며 곡하였다고 한다. 허격은 또 송시열에게 편지를 보내 조정의 공식적 지원을 받아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낸 명나라 신종의 제사를 드리면 어떻겠느냐 물었는데, 송시열도 답서에 “의종을 어찌 뺄 수 있겠는가”라는 의견을 더하며 적극 찬성하였다. 그러나 허격의 바람과는 달리 조정의 공식적인 지원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존명 사적의 ‘원조’이자 ‘상징’이 된 조종암 ]

‘조종암 3현’이 조종암에 글자를 새기기 10년 전인 1674년(현종 15), 송시열이 화양계곡에 명나라 숭정제의 어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을 새겼다. 명나라가 멸망한 지 1주갑[60년]이 되는 1704년(숙종 30), 권상하(權尙夏) 등 송시열의 문하생들은 ‘비례부동’이 새겨진 괴산군 청천면(靑川面) 화양동(華陽洞)에 스승의 유훈에 따라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제향하는 만동묘(萬東廟)를 세운다. 만동묘(萬東廟)의 ‘만동’은 조종암의 ‘만절필동(萬折必東)’ 글자에서 본 떠간 것이었다. 이후 만동묘는 국가의 공인 하에 정식으로 신종과 의종을 제사하는 사당이 되었고, 1704년 12월에는 창덕궁 금원(禁苑)에 대보단(大報壇)이 건립되어 명나라 태조·신종·의종의 제사를 지냈다.

조종암은 만동묘·대보단보다 먼저 명나라 황제의 단을 세워 존명(尊明) 사적(事蹟)의 ‘원조’로 불렸다. 하지만 조정의 공식적인 지원을 받지 못해 가려져 있던 조종암이항로를 비롯한 화서학파에 의해 다시 주목받았다. 이항로는 명나라가 망하고 3주갑이 되는 1824년(순조 24)에 명나라 멸망을 애도하기 위해 노론계 재야 선비들과 조종암을 찾았다. 그리고 조종암 아래 너럭바위에 ‘견심정(見心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싶다는 시를 남겼고, 이후에도 제자들과 함께 찾아와 ‘중국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사상적 기반을 다졌다. 1868년(고종 5) 이항로가 사망한 뒤 제자인 유중교(柳重敎)[1832~1893]가 스승의 뜻에 따라 너럭바위 위에 정자를 짓기로 하고, 1874년(고종 11)에 ‘견심정(見心亭)’이란 글자를 새겼다. 유중교가 중심이 되어 1876년(고종 13) 이항로의 제자인 김평묵(金平默)·유중악(柳重岳)·유인석(柳麟錫)·이성집(李聲集) 등은 가평에 함께 거주하면서 대곡서당(大谷書堂), 자양서사(紫陽書社) 등의 서당을 만들어 강학을 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등 이항로의 위정척사 사상을 공고히 다져갔다. 그리고 가평과 조종암은 화서학파 유생들이 일생에 꼭 한번은 방문해야 할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

[명나라 유민의 후손이 창건한 조종암 대통묘 ]

이항로조종암을 처음 방문하고 6년 뒤인 1831년(순조 31), 명나라 유민의 후손인 왕덕일(王德一)[1779~1854], 왕덕구(王德九)[1788~1863], 정석일(鄭錫一), 풍재수(馮載修), 황재겸(黃載謙) 등이 가평으로 이주하였다. 왕덕일 등은 조종암에서 200m 정도 떨어진 작은 골짜기에 단을 쌓고 ‘대통행묘(大統行廟)’라 이름 짓고 1월 4일[명나라 건국일]마다 명나라 태조를 제사 지냈다. 또 명나라 9의사(義士)인 왕이문(王以文)[본명 왕봉강(王鳳崗)], 양복길(楊福吉), 왕미승(王美承), 풍삼사(馮三仕), 황공(黃功), 정선갑(鄭先甲), 배삼생(裵三生), 왕문상(王文祥), 유계산(柳溪山)을 제사하는 구의행사(九義行祠)도 세웠다. 명나라 황제와 함께 배향된 9의사는 청나라군에 저항하다 포로가 되어 심양(瀋陽)에 끌려간 뒤, 그곳에 머물던 봉림대군(鳳林大君)[훗날의 효종]의 북벌 의지를 확인하고 반청복명(反淸復明)의 대업을 함께 이루고자 1645년(인조 23) 조선으로 망명한 사람들이다. 대통행묘와 구의행사가 세워지며 조종암은 이제 만동묘·대보단과 같은 위격을 가지게 되었다.

명나라 유민들은 망명 후 훈련도감에 소속되거나 사역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는 한학 교수에 임명되기도 하였지만, 명나라 신하임을 자임하며 조선의 관직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혹은 급료를 받지 않고 고기잡이를 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었다. 1704년(숙종 30) 창덕궁 후원에 대보단이 설치되고 조선왕조가 중화 문명을 잇는다는 ‘조선 중화 사상’이 표면화되면서, 명나라 유민들은 ‘황조인(皇朝人)’, 즉 ‘황제 나라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부여받았다. 황조인들은 서울 어의동(於義洞)의 ‘황조인촌’과 근처 돈암동에 거주하며 대보단 제사에 참여하였고, 대보단 수직관(守直官)을 대대로 맡아 행하였다. 명나라 유민의 후손 중 왕덕일과 왕덕구는 왕이문의 5대손으로 형제 관계였는데, 반청 복수의 사상을 가풍으로 삼아 살았다. 그러나 명나라가 망하고 3주갑이 흘렀음에도 청나라의 세가 오히려 확장하는 것을 보고는 오직 조선만이 대의(大義)를 보존하고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특히 명나라 황제의 어필이 전해지는 조종암에 대통(大統)이 전해진다고 여겨 돈암동에서 가평으로 이주하였다.

창덕궁의 대보단과 달리 조종암의 대통행묘 제례는 청나라의 신하 되기를 거부한 명나라 유민들 스스로가 시작한 것이다. 명나라 유민들은 ‘망복지의(罔僕之義)’, 즉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의리’를 간직하는 한편, 중화 문명을 수호하는 한족의 후예라는 의식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춘추 의리를 바탕으로 조선에 정착한 선조들의 행적을 정리하여 저술과 편찬 작업을 하는 한편, 남명(南明) 왕조의 마지막 연호인 ‘영력(永曆)’ 연호를 사용하는 등 명나라 후예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려 노력하였다.

[춘추 의리의 상징으로 제향이 이어져 온 조종암]

1858년 단 아래 사는 대보리 백성들의 호역(戶役)이 영구히 면제되면서 대통행묘는 국가의 공인을 받았다. 1865년(고종 2) 대원군의 명으로 조종제의 제사가 중지되었다가, 이항로를 비롯한 재야 유생들의 끈질긴 상소로 1878년(고종 15) 다시 호역을 면제받으며 향사가 이어졌다. 1908년 일제 통감부가 임진왜란과 관련된 명나라 추모 사당을 일제히 철폐할 때 대보단과 만동묘가 철폐되었는데, 대통행묘에서의 제향만은 1934년까지 비밀리에 지속되었다. 잠시 끊겼던 제향은 1958년부터 다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1979년에는 대통묘가 중건되었다. 대통묘의 중앙에는 명나라 태조·신종·의종을 봉안하였고, 동편에는 조선 문무(文武) 9현, 서편에는 명나라 9의사를 봉안하였다.

동편의 조선 문무 9현은 김상헌(金尙憲)·김응하(金應河)·홍익한(洪翼漢)·임경업(林慶業)·이완(李浣)·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이항로·유인석으로, 모두 대명 의리와 절의를 지킨 선현들이다. 윤집·오달제·홍익한은 심양에 끌려가 죽임을 당한 삼학사이고, 김응하는 후금과의 전쟁에 명나라 원군으로 나가 전사하였으며, 임경업은 대명 의리를 위해 청나라에 굴하지 않은 장군이었다. 이완은 효종의 북벌 정책을 도와 병력을 정비한 무인이었고, 김상헌·이항로·유인석은 존명 사상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조선 후기에 조종암 3현과 화서학파, 명나라 유민의 후손들은 조선이 중화의 대의(大義)를 계승하였다고 여겨 조종현조종암을 찾아왔다. 최근 국내에서는 사대 외교와 사대주의 사상을 비판하기 위해 조종암을 찾는 이들이 있다. 한편 중국 허베이성의 유교학회에서는 소중화주의와 춘추 의리를 상징하는 곳으로 여겨 2015년부터 2019년 현재까지 매년 답사를 와서 제사에 참여한다고 한다. 조종암대통묘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보전되어 왔지만, 사람들이 찾는 목적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 왔다. 앞으로 우리는 어떤 의미와 상징을 찾기 위해 조종암을 찾게 될까?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