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지만 다른 가평의 일상기록, 혼례의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1639
한자 -- 加平- 日常記錄, 婚禮儀禮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가평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덕묵

[정의]

경기도 가평 지역 혼례의 변화상.

[개설]

혼례는 몇 가지 측면에서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사회적으로 보면 일생 의례 중 남자와 여자가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기 위한 것이지만 남자와 여자의 만남을 넘어 두 집안이 인척 관계를 가지게 되는 집안의 만남이다. 혼례 잔치는 집안의 행사에 국한되지 않고 주민들이 다 같이 즐기는 마을 잔치이며 특히 신부가 장차 살게 될 시댁 마을의 입장에서 보면 앞으로 함께 품앗이하고 상부상조해야 할 새로운 신입 회원 즉, ‘새댁’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종교적 측면에서 보면 의례 행위 속에 종교적 세계관이 상징적 행위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셋째, 문화적으로 보면 그 시대의 사회상을 담고 있다. 그 밖에도 혼례를 통해 빈부의 차이, 지역적 차이 등 다양한 의미들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가평의 혼례를 통해 이 지역의 특징이나 시대에 따른 변화상 등을 알아볼 수 있다.

[혼례의 변화상]

가평 주민들의 혼례를 1930년대에서부터 최근까지 보면 많이 변했음을 알 수 있다. 변화상은 전통 혼례식에서 예식장 결혼식으로 바뀐 점, 초혼에서 만혼으로 결혼식을 하는 연령이 늦어진 점, 촌락이라는 공간에서 예식장으로 바뀐 점, 혼수품이 풍부해진 점, 얼굴도 보지 못한 채 혼례식에서 처음 보았던 과거에서 맞선을 통해 서로 얼굴을 보게 되고 또한 교제 기간을 가지는 점, 연애 결혼이 늘어난 점 등 다양한 변화상을 볼 수 있다.

1930년대에 결혼한 조일규 씨 사례를 보면 신부가 17세 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에 끌려간다고 하여 부모님이 딸의 혼례를 서둘렀다는 점이 주목된다. 오늘날과 같이 만혼이 많은 시대와 비교하면 매우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40년대에 결혼한 김순희 씨의 경우에도 16세에 결혼을 하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결혼한 김간난 씨와 이정례 씨가 19세에 결혼한 것과 비교해도 몇 살이 어른 나이이다. 일제 강점기라는 국난 속에서 제국주의의 강탈에 의해 처녀들이 희생될 수 있는 상황에서 빚어진 조혼 풍습이다.

혼수감의 측면에서 분석해 보면 1940년대까지는 신랑은 함 속에 저고리와 치마를 지어 입을 수 있는 옷감 몇 개를 넣어 보내는 것이 전부이며 신부는 버선 몇 컬레와 옷 몇 벌을 해가지고 오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빈부에 따라 차이가 있겠으나 가평의 일반 농가의 경우 이 정도가 전부였다. 1950년대에 결혼한 김간난 씨의 경우를 보면 신랑집에서 보내는 함 속에 든 옷감이 보다 늘어났고 벨벳과 같은 귀한 옷감이 추가되었으며 은반지와 은비녀가 혼수품에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60년대에 결혼한 이정례 씨의 경우 그 전보다 늘어났으며 1970년대에 결혼한 오영선 씨의 경우 금반지 세 돈을 받았다. 1980년대의 경우에는 금반지, 금목걸이까지 보내지며 한복 옷감뿐만 아니라 양장, 바바리코트, 화장품 세트까지 추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50년대 이전까지는 가평의 농가에서 옷감을 보내는 정도였으나 이후에는 보석이 추가되고 추가된 보석도 은에서 금, 금에서 여러 가지 보석이 추가되는 경향으로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는 귀금속이 고루 포함된 즉, 반지, 목걸이, 팔찌, 귀걸이 등을 세트로 구입하여 선물하는 추세이다. 그 밖에도 다양한 혼수품들이 늘어났다.

예식을 하는 장소는 1970년대까지 자택에서 하고 피로연은 마을 잔치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80년대에 결혼한 장기유 씨의 사례부터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하고 식당에서 피로연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부터 이제 자택에서 하는 전통 혼례식은 볼 수 없게 되었다. 1950년대까지 약혼에 대한 개념이 보이지 않다가 1960년대 이정례 씨의 사례를 보면 약혼식 대신 양장과 양복을 입고 현리 사진관에 가서 약혼 기념사진을 촬영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1980년대에 결혼한 장기유 씨는 처가댁에서 약혼식을 하였다. 한편 1980년대부터는 장기유 씨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신혼여행에 대한 개념까지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중매가 들어오면 부모가 혼사를 결정하고 남녀는 서로 얼굴도 모른 채 혼례식에 참석하였다. 1960년대에 결혼한 이정례 씨의 경우에도 친정아버지와 시할아버지가 주막에서 만나 두 분이 혼례를 결정하였다. 1970년대 오영선 씨의 경우 가평 중국집에서 맞선을 보았음이 조사되었다. 1970년대 이후 맞선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1980년대에 결혼한 장기유 씨의 경우를 보면 맞선을 보고 1년간 연애 기간을 가진 후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상견례를 하고 이후 약혼식과 결혼식을 진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전과 달리 연애 기간이 생기고 양가 집안이 참석하는 상견례 자리가 행해지고 결혼을 하는 방식으로 이전과 다른 양상이 보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시의 부유한 사람들은 보다 이른 시기에 금은보화로 혼수품을 건넨 사례도 있어 개인이 처한 환경에 따라 다양한 예외가 있을 수 있으나 위의 사례를 통해 가평 지역의 일반적인 서민들의 결혼 풍습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의 혼례]

가평군 가평읍 복장리에 거주하는 조일규[1914년생]는 가평읍 이화리에 거주하는 이화영[1914년생]을 이종사촌 형의 중매를 통해 만났다. 당시 신부는 17세이나 시집을 늦게 가면 일본군에 끌려간다고 딸들의 혼례를 서둘렀다. 사주와 저고리 한감, 치마 두 끝이 든 함은 사촌 형이 들고 갔다. 혼례일 신랑은 가마를 타고 신부집으로 왔다. 당시 신랑도 가마를 탔는데 잘 사는 집은 4인교를 탔지만 그렇지 못한 집은 2인교를 탔다. 신랑이 올 때 시삼촌과 큰집 시아주버님도 왔다. 친정집 마당에 초례청을 차렸다. 초례상은 마을의 부잣집에서 빌렸고 식기와 그릇은 가까운 이웃들에게 빌렸다. 초례청을 차리는 일은 이웃에서 도와주었다. 시집갈 때 혼수는 동네 처녀들과 마을에서 결혼하여 첫 아들을 낳은 여자들이 주로 참가했다. 시집올 때 버선 한 죽 즉 열컬레와 치마 네 개를 만들어왔는데 막내딸이라고 친정어머니가 더 해 준 것이다. 친정집에서 시댁에 드리는 것은 집안에서 바느질을 잘 하는 당숙모가 맡았으며 신랑 옷 한 벌과 시부모님께 드릴 옷감 한 감씩을 보냈다. 당시로는 아주 잘 해주었다는 말을 들었다. 초례청에서 집례는 친정의 작은 할아버지가 보았다. 전안례, 교배례, 합근례를 마치고 첫날밤을 자고 시댁으로 왔다. 가마에서 내리니 큰집에 가서 인사를 드리라고 하여 인사를 한 후 시댁으로 오니 시어머니가 터주신에게 인사를 하라고 하며 뒷마당에 데리고 가서 절을 하게 하였다. 방으로 들어가서 시댁 식구에게 인사를 드리고 3일 후 친정에 다녀왔다. 3일 동안은 시어머니가 밥을 지어주어 먹었다. 친정을 갈 때 이바지음식을 싸주어 신랑이 들고 갔다. 신랑다루기를 한다고 하여 사람들이 모였으나 큰오빠가 못하도록 막아주었다.

[1940년대의 혼례]

강원도 춘천 남면 반춘리에서 살던 김순희[1928년생]는 열여섯 살이 되던 1943년에 가평읍 금대리 정창원[1921년생]과 중매로 만나 혼인하였다. 당시 시할아버지가 궁합을 보고 친정에서 혼인날을 택일하였다. 함은 혼인날 같이 들어왔으며 함 안에 사주단자, 목운단으로 지은 빨간색 치마와 노란색 저고리 한 벌, 남색 치마와 분홍 저고리 한 벌이 있었다. 목기러기도 함께 가져왔는데 집안에 들어올 때 친정어머니가 치마로 받아 쌀 항아리 위에 얹었다. 신부 화장은 이웃 아주머니가 해주었으며 크림을 바르고 그 위에 분을 바른 후 연지 곤지를 붙였다. 머리치장은 쪽진 다음 큰 비녀를 꽂고 족두리를 얹었다. 손에는 큰 명주 손수건을 들고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 대례를 치룬 후 오후에 2인이 메는 가마를 타고 시댁으로 갔다. 저녁에 친정해서 준비해 온 대추, 밤, 닭, 술 등으로 폐백 음식을 차려드렸다. 예물로는 버선 일곱 컬레, 옷 댓 벌, 속옷 몇 벌을 가져왔다. 삼일 째 되는 날부터 부엌일을 하였다.

[1950년대의 혼례]

김간난[1937년생]은 남이섬 옆에서 1955년 열아홉살 때 고모의 중매로 금대리로 시집을 왔다. 혼례날 전에 온 함에는 벨벳, 카키색 옷감, 치마감과 저고리감, 은반지, 은비녀가 들어 있었다. 광목과 목면은 당시 많이 쓰이던 옷감이었으나 벨벳은 귀하였다. 이 옷감은 바느질 솜씨가 좋은 올케에게 맡겨 혼례식에 입을 치마와 저고리를 만들었다. 그 외 시집에 올 때 친정집에서 짠 옷감으로 만든 옷도 챙겨 왔다. 신부집에서 대례를 하였으며 신부는 빨간 치마에 노란 저고리를 입고 색동 한삼을 입었다. 머리는 쪽을 쪄 비녀를 꽂고 족두리를 썼다. 신은 고무신을 신었다. 화장은 친정 올케가 해주었으며 분을 바르고 연지 곤지를 찍었다. 신랑은 남색 관복을 입었고 흰 바지와 저고리, 파란 조끼, 옥양목으로 만든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바지와 저고리는 솜씨가 있는 사촌 형수가 지어주었다. 친정집에서 대례를 마치고 두 사람이 메는 가마를 타고 시댁으로 왔다. 이튿날 아침에 화장을 하고 한복을 입은 후 시부모에게 폐백을 드리고 사당에 가서 인사[사당차례]를 드렸다.

[1960년대의 혼례]

이정례[1937년생]는 상동리 불기에서 이웃 아주머니의 소개로 1960년대 초에 상면 태봉리로 시집을 왔다. 혼례의 결정은 친정아버지와 시할아버지가 우무정 고개 주막에서 만나 그 자리에서 결정하였다. 친정 마당에서 대례를 치루었다. 혼례일에는 미리 신랑집에서 보낸 채단과 저고리감으로 지은 분홍색 치마와 저고리를 입었다. 혼례를 마친 후 요강, 대야, 농, 이불 등을 트럭에 싣고 시댁으로 왔다. 홍순미는 서울에 거주하다가 19세에 가평 출신의 이웃 사람의 중매로 1960년대 초에 혼례를 하여 태봉리로 왔다. 약혼식 대신 양장과 양복을 입고 현리 사진관에서 약혼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혼례는 그해 음력 11월에 시댁 마당에서 하였으며 동네의 혼례용품을 이용하였으며 동네잔치 후 시댁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1970년대의 혼례]

도대리 오영선[1948년생]은 27세에 열 살이 많은 김수남[1938년생])을 친척 할아버지의 중매로 만나 1970년대 중반에 혼례를 치루었다. 당시 가평의 중국집에서 친정 부모와 함께 맞선을 보러가서 신랑을 처음 만났다. 혼례는 도대리 시댁에서 했다. 대례를 치루고 동네잔치를 했다. 친정이 가난하여 시댁에 오면서 혼수는 거의 해오지 못하고 시어머니께 옷감 한 벌을 드렸다. 시댁에서는 신부에게 금반지 세 돈을 해주고 친정에도 옷을 한 벌 해주었다.

[1980년대의 혼례]

금대리 장기유[1957년생]는 동갑인 아내와 맞선을 보고 1년간 사귄 후 결혼하였다. 결혼을 결정한 후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상견례를 하였다. 결혼 전 처가댁에서 약혼식을 하였는데 처가댁에 부담을 드리지 않고자 부모님과 형제들, 큰형수만 갔다. 부친이 날을 잡아 결혼식 3일 전에 함을 지고 친구들과 처갓집에 갔다. 함 안에는 부친이 쓴 혼서지와 사주, 청실, 홍실, 금반지 닷 돈, 금목걸이 닷 돈, 화장품 세트, 바바리코트, 양장 옷감, 한복 옷감을 넣었다. 1983년 가평 읍내 모란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날짜는 양가 부모님이 결혼한 달을 피해 달을 잡았다. 주례는 지역 유지이며 부친의 동창인 분이 해주었다. 신부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꽃다발을 들었으며 신랑은 흰 와이셔츠 위에 검은 양복을 입고 빨간 넥타이를 매고 흰 색 장갑을 꼈다. 하객들은 남자의 경우 양복을 입고 여자의 경우 한복을 많이 입었다. 결혼식 후 기념 촬영을 하고 피로연은 양가가 따로 식당을 잡았다. 결혼식 후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가려고 하였으나 일기가 좋지 않아 신랑집으로 갔다. 다음날 아침 신부는 화장을 하고 빨간 치마, 녹색 저고리 위에 녹색 원삼을 입고 머리는 파마를 했기 때문에 그냥 시늉으로 비녀를 찌르고 족두리를 얹었다. 손에는 한삼을 들었으나 연지 곤지는 찍지 않았다. 신랑은 자주색 바지, 저고리 위에 붉은색 마고자를 입었다. 그 위에 관복을 입고 머리는 검은 명주로 두른 후 사모를 썼다. 당시 폐백옷은 동네에서 혼례 때 입기 위해 보관해 둔 것을 사용했다. 이렇게 혼례복을 갖추어 입고 시부모에게 폐백을 드린 후 사당에서 조상님들께 인사를 드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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