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791 |
---|---|
한자 | 崔宗和 |
영어공식명칭 | Choe Jonghwa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북면 이곡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범성 |
출생 시기/일시 | 1896년 10월 3일 - 최종화 출생 |
---|---|
수학 시기/일시 | 1907년 - 최종화 가릉보성학교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15년 - 최종화 휘문의숙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17년 - 최종화 수원농림전문학교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5~16일 - 최종화 북면 만세시위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19년 12월 15일 - 최종화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최종화 대통령표창 서훈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최종화 건국훈장 애국장 서훈 |
출생지 | 최종화 출생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이곡리 287 |
거주|이주지 | 최종화 거주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이곡리 287 |
활동지 | 최종화 북면 만세시위 참여 활동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일대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북면 만세시위 참여 |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가평군 출신 독립운동가.
[가계]
최종화(崔宗和)[1896~1919]의 본관은 수성(隋城)이며, 아버지는 궁내부 주사와 승훈랑(承訓郎)을 지낸 최기완(崔基完)이다. 본적은 경기도 가평군 북면 이곡리 287이다. 15세 때 류은상(柳殷相)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자식으로 최승덕(崔承德)이 있다.
[활동 사항]
최종화는 8살 때부터 한학을 배웠고, 이병찬(李炳贊)에게 사서(四書)를 배운 뒤 1907년 가릉보성학교(嘉陵普成學校)에 입학하였다. 가릉보성학교를 졸업한 뒤 1915년에 휘문의숙(徽文義塾)에 들어갔으며, 1917년 수원농림전문학교(水原農林專門學校)에 입교하였다가 1919년 2월 가평으로 돌아왔다.
1919년 3월 서울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을 때, 마침 고종 인산일을 기해 서울에 올라갔던 가평 출신 이규봉(李圭鳳)이 이를 목격하게 되었다. 이규봉은 서울에 있던 자신의 제자 정한교(鄭漢敎), 신태연(申泰鍊), 민영순(閔泳純)을 만나 3·1운동의 경위를 듣게 되고, 가평지역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킬 생각을 가지고 「독립선언서」 2매, 『독립신문』 1매를 가지고 돌아왔다. 돌아오던 중 최종화와 만난 이규봉은 그에게 서울의 상황을 전했고, 최종화는 이에 적극 참여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규봉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장남 이윤석과 정흥교(鄭興敎)와 만나 만세시위를 모의하였고, 3월 7일 장기영(張基英), 정성교(鄭聖敎), 정재명(鄭在明), 이병찬(李炳贊) 등 20여명의 주민들을 불러 모아 거사를 준비하였다. 거사일은 3월 15일로 정해졌으며, 최종화는 동생 최용화와 함께 참여할 뜻을 밝혔다. 최종화는 비밀리에 태극기를 제작하는 임무를 맡았고, 약 100여개의 태극기를 제작하는 한편 북면 일대 주민들에게 거사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리하여 거사 전까지 북면 일대에서 1,800여 개의 태극기와 500여 매의 비밀통문이 제작되었다.
거사 당일 최종화와 주도 인물들은 북면사무소에 도착하여 주민 수백명과 함께 만세를 부른 뒤, 사전에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가평 읍내로 이동하였다. 이어 각 관공서를 돌며 독립만세를 외쳤는데, 가평 읍내에 있던 주민들도 이에 호응하여 인파는 더욱 늘어났다. 이 때 불어난 인원은 수천에 이르렀으며, 저녁에 이르러서야 주민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일본 경찰은 만세시위를 주도한 인물들을 색출하기 시작하였고, 최종화는 이규봉, 이윤석, 최기선(崔基善), 최인화(崔仁和), 최용화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들이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자 장기영, 정성교, 이교성(李敎聖), 홍종선(洪鍾先) 등은 이튿날 주민 약 200여 명과 함께 헌병주재소를 향해 달려갔다. 이들은 목동리 당고개에서 헌병들과 만나 거칠게 저항하였으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전날 체포된 이들과 합쳐 수십여 명이 수감되었다. 최종화는 1919년 4월 16일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그해 12월 15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최종화는 1977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