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6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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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必行 |
영어공식명칭 | Lee Pilhaeng |
이칭/별칭 | 이원(而遠),천미(天微)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현채 |
출생 시기/일시 | 1589년 - 이필행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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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23년 - 이필행 알성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29년 - 이필행 예조 좌랑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31년 - 이필행 병조 좌랑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645년 - 이필행 사망 |
출생지 | 한성 - 서울특별시 |
거주|이주지 | 여주 - 경기도 여주시 |
묘소|단소 | 이필행 묘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
성격 | 문관 |
성별 | 남 |
본관 | 광주 |
대표 관직 | 병조 좌랑 |
[정의]
경기도 가평군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가계]
이필행(李必行)[1589~1645]의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자는 이원(而遠)이고, 호는 천미(天微)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영의정 이준경(李浚慶), 할아버지는 이조 참의에 추증된 이예열(李禮悅), 아버지는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된 이사수(李士修)이다. 어머니는 김선(金銑)의 딸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 尹氏)이다.
[활동 사항]
이필행은 서울의 저택에서 태어났다. 가풍은 『소학』을 따랐다. 1621년(광해 13)에 과거 급제를 하였으나 3년 동안 합격 발표를 받지 못하였고, 이후 1623년(인조 1)에 다시 알성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소속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어가를 호위하여 강화도에 들어갔다. 1627년 2월에 박사가 되었다가, 환도한 뒤 병으로 사직하였다. 1628년(인조 6) 다시 박사에 제수되었고, 이후 성균관 전적을 거쳐 사헌부 감찰에 올랐다. 1629년(인조 7)에는 예조 좌랑, 1631년(인조 9)에는 병조 좌랑으로 옮겼으나 오래 가지 못하여 해임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관직을 옮겼으나 대부분은 사직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서 호종(扈從)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천(利川)에서 적병에게 길이 막혔다. 이후 강원도 원주로 발길을 돌렸다가, 전임 판서(判書) 이현영(李顯英)이 지평(砥平)[지금의 경기도 양평군]에서 의병을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합류하였다. 1637년(인조 15) 1월 20일이 지나 춘천(春川) 지역에 이르렀는데, 적병의 핍박을 받아 간신히 산으로 올라가 5일 동안 눈 속에서 묵었다. 이후 양양(襄陽)을 거쳐 정선(旌善)에 이르렀을 때 인조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그 뒤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한 채 거절하고 여주에 머물렀다. 1645년(인조 23) 2월 여주의 별장에서 사망하였다. 숙종 때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묘소]
이필행이 사망한 뒤 1645년(인조 23) 10월에 양근군(楊根郡) 치소(治所) 북쪽인 미원현(迷源縣) 울업산(蔚業山) 무돈곡(茂敦谷)에 장사지냈다. 지금의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이다. 묘갈명은 윤선도(尹善道)[1587~1671]가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