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586
한자 吳慶錫
영어공식명칭 Oh Kyeongseok
이칭/별칭 원거(元秬),역매(亦梅),진재(鎭齋),천죽재(天竹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회곡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김근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31년연표보기 - 오경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46년 - 오경석 식년시 잡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866년 - 오경석, 병인양요 일어나자 베이징에 파견되어 정보 수집
활동 시기/일시 1876년 - 오경석 한학당상역관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77년 - 오경석 숭록대부 제수
몰년 시기/일시 1879년연표보기 - 오경석 사망
묘소|단소 오경석 묘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회곡리 지도보기
성격 학자
성별
본관 해주
대표 관직|경력 한학역관

[정의]

경기도 가평군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개항기 학자.

[가계]

오경석(吳慶錫)[1831~1879]의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자는 원거(元秬), 호는 역매(亦梅)·진재(鎭齋)·천죽재(天竹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오도원(吳道源), 할아버지는 오계순(吳繼淳), 아버지는 오응현(吳膺賢)이다. 어머니는 금산 이씨(金山 李氏) 이연(李埏)의 딸이다. 동생으로 오경윤(吳慶潤), 오경림(吳慶林), 오경연(吳慶然), 오경학(吳慶鶴) 등이 있다. 아들은 3·1운동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오세창(吳世昌)이다.

[활동 사항]

오경석은 유년기에 이상적(李尙迪)의 문하에서 한어(漢語)와 서화를 공부하였고, 가학(家學)으로 박제가(朴齊家)의 실학을 공부하였다. 1846년(헌종12) 식년시 잡과에 급제한 후 역관이 되었다. 1853년(철종 4)에 처음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이후 13차례에 걸쳐 역관으로 청나라를 왕래하며 신학문에 눈을 떴다. 『해국도지(海國圖誌)』, 『영환지략(瀛環誌略)』 등의 서적을 들여와 친구인 유홍기(劉鴻基)에게 읽게 하였고,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 소장 정치인들을 지도하여 개화파 형성에 기여하였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베이징에 파견되어 정보를 수집하였고, 이후 흥선대원군에게 지구전을 펼쳐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하였다. 1869년(고종 6) 통정대부, 1873년(고종 10) 가선대부, 1875년(고종 12) 자헌대부가 되었고, 1876년(고종 13)에는 한학당상역관(漢學堂上譯官)으로 좌의정 박규수(朴珪壽)와 함께 문호 개방을 주장하며 병자수호조약(丙子條好條約)[일명 강화도조약] 체결에도 관여하였다. 병자수호조약 체결 직후인 1876년(고종13) 4월에 과로로 병석에 누웠다. 1877년(고종 14)에는 숭정대부를 거쳐 숭록대부가 되었다. 병석에 누운 이후 회복하지 못한 채 1879년(고종 16)에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오경석은 중국과 국내를 돌며 방대하고 희귀한 서화들을 수집하였다. 또한 금석학(金石學)에 관심이 많아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을 집필하였다. 저서로는 『삼한금석록』 외에 『삼한방비록(三韓訪碑錄)』, 『천죽재차록(天竹齋箚錄)』, 『양요기록(洋擾記錄)』 등이 있다.

[묘소]

오경석의 묘는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회곡리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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