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446
한자 3·1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가평군 북면|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주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19년 3월 1일연표보기 - 3·1운동 전개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15일 - 가평군 북면, 가평 읍내 만세 시위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19년 3월 16일연표보기 - 북면 만세 시위 종결
발생|시작 장소 경기도 가평군 북면 지도보기|경기도 가평군 가평읍지도보기
종결 장소 경기도 가평군 북면 지도보기|경기도 가평군 가평읍지도보기
성격 항일 독립 운동
관련 인물/단체 신숙|정한교|민영순|이규봉

[정의]

1919년 경기도 가평군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

[역사적 배경]

가평군은 북한강 중류의 산간지대에 위치하며, 예로부터 서울과 춘천 간을 연결하는 건널목이자 중부전선의 요충지이다. 가평군의 3·1운동은 이러한 지리적 입지, 즉 중앙과 비교적 가깝다는 점과 산간지대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가평군 3·1운동의 전체상을 파악하려면 가평 출신으로 중앙에서 활동한 신숙(申肅)[1885~1967], 정한교(鄭漢敎), 민영순(閔泳純) 등의 활동과 가평 관내에서 운동을 주도한 이규봉(李圭鳳)을 주목해야 한다. 특히 이규봉가평군 북면 목동리 출신으로, 그곳에서 한학을 가르치면서 목동리 구장[현 이장]을 맡고 있었다. 이규봉신숙, 정한교 등을 통해 서울에서 전개된 3·1운동 소식을 접하는 한편 가평군에서 만세 운동을 전개할 것을 부탁받고 만세 시위를 촉발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경과]

가평군의 3·1운동은 3월 15일과 16일 양일간에 걸쳐 북면과 가평 읍내에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오전 9시 경, 가평군 북면의 주민 수백명이 북면사무소 앞에 모여 만세를 외치고 가평 읍내로 행진하였다. 가평군수와 헌병소장이 해산을 명령하고 제지하였으나 만세 시위 군중은 이에 불응하였다. 3월 16일에는 전날 피검된 시위자들을 구출할 목적으로 이어졌다. 이날 시위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인사는 수십명에 달할 정도로 격렬하면서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결과]

북면의 만세 시위로 상징되는 가평군의 3·1운동은 ‘짧고 격렬한 시위’로 축약된다. 가평군 북면 시위로 70여 명이 수감되었고, 그 중 28명이 징역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북면 시위 이외에도 독립만세운동이 확인되지만 구체적인 양상은 파악하기 어렵다.

[의의와 평가]

가평군의 3·1운동은 문헌 상 3월 9일 군청 뒷산 봉화 시위, 3월 15~16일 북면 시위, 4월 초 무력 시위 등이 확인된다. 이 중 규모가 컸고, 격렬한 시위 양상을 보인 북면의 만세 시위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 북면 시위에서 보이는 특징은 시위 주도자와 참여자 다수가 농민이었다는 점과 시위 양상이 시위대와 일본 헌병과의 충돌은 있었지만 대체로 평화적인 양상을 보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가평의 3·1운동을 기리기 위해 가평군에서는 1994년 3월 1일 가평읍 대곡리 가평 종합운동장 인근에 3m 높이의 가평 의병, 3·1항일운동기념비를 건립하였다. 해마다 3월 15~16일에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을 거행하여 순국선열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추모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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