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백교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449
한자 白白敎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적목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주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23년 - 백백교 창설
발생|시작 장소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적목리 지도보기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백백교|전용해|문봉조|이경득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적목리에서 일어난 사건.

[역사적 배경]

일제 강점기에는 신흥 종교와 관련된 사건 및 사고가 적지 않았다. 혹세무민의 교리는 불안한 현실을 탈피하려는 일반 민중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백백교는 동학에 기원을 둔 것으로 동학의 방계인 백도교(白道敎)의 분파로 시작되었다. 동학군 전정운은 1899년 경 금강산에서 4년 동안 수도한 뒤 함경남도 문천군 사람들을 대상으로 교화를 시작했다. 그는 1912년 강원도 금화군 오성산에 본거지를 두고 백도교를 창설하였고, 1916년 경에는 신자가 1만여 명에 달했다. 1919년 전정운이 죽자 골육 간에 분열이 일어났다. 1923년에 전정운의 장남 전용수는 인천교(人天敎)를, 차남 전용해는 가평군 북면 적목리에서 백백교를, 3남 전용석은 도화교(道花敎)를 세웠다. 그런데 1930년 전정운이 애첩 4명을 생매장한 사실이 폭로되어 백도교 간부들이 연이어 검거되었다. 이에 전용수는 피신하였고, 백백교는 지하로 잠적하였다.

[경과]

백백교 교주 전용해는 추종자들에게 “나는 장래에 천위(天位)에 등극할 인물이므로, 지금 일본의 통치에 있지마는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백백교주 통솔하에 독립이 될 터이니 교도의 헌금과 기량에 따라 대신, 참의, 도지사, 군수, 경찰서장의 영직에 임명한다”고 하며, 신도의 재산과 딸을 바치도록 했다. 전용해를 비롯한 간부들은 전국에서 80여 회에 걸쳐 300여명의 신도들을 살해하였다.

1937년 2월 21일 전용해의 자살로 백백교 사건의 전모가 세상에 드러났다. 1937년 4월 13일자로 발행된 『조선일보』에 의하면 백백교 간부 문봉조(文奉朝)는 교주 명령으로 170명을 죽였고, 이경득(李敬得)은 신도들의 재산과 정조를 빼앗은 비행을 숨기기 위해서 100여 명을 죽였다고 하였다.

[결과]

백백교 간부들은 사형 및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며, 이 외의 사람들은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의의와 평가]

백백교 사건은 일제가 우민정책(愚民政策)을 은연 중에 조장한 데에서 빚어졌으며, 상당 부분 부풀려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총독부는 백백교 사건을 계기로 신종교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하면서, 특히 민족적 종교단체를 해체시키는 구실로 삼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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