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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643
한자 六-二五戰爭
이칭/별칭 한국 전쟁,6·25 사변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현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건·사고|사회 운동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6월 25일 - 6·25 전쟁 발발
종결 시기/일시 1953년 7월 27일 - 6·25 전쟁 중단
전개 시기/일시 1950년 7월 4일연표보기 - 북한군 인천 지역 점령
전개 시기/일시 1950년 9월 15일 - 유엔군 인천 상륙 작전 단행
전개 시기/일시 1950년 9월 17일연표보기 - 유엔군 인천 지역 수복
전개 시기/일시 1950년 1월 5일 - 북한군 인천 지역 재점령
전개 시기/일시 1950년 2월 10일 - 유엔군과 한국군 인천 지역 재수복
발생|시작 장소 인천 소년 형무소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

[정의]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를 비롯한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전쟁.

[역사적 배경]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발발한 후 북한군은 1950년 6월 28일 서울 지역을 점령하였고, 1950년 7월 3일 밤 경인 가도 등을 통해 인천 지역으로 진격하여 인천 지역의 각 기관을 점거하였다. 1973년 7월 3일 밤부터 7월 4일까지 인천 지역의 점령을 완료한 북한군은 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에 있는 해광사(海光寺)에 정치 보위부를 설치하고 우익 인사들을 색출하기 시작하였다.

[경과]

1950년 7월 4일 북한군 제6사단 제13연대가 인천 지역을 점령하면서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은 북한군의 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인천 지역에 주둔한 북한군은 피난가지 못하고 남아 있던 우익계 인사들을 체포하여 인천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 후 기소를 거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 인천 소년 형무소에 수감하였다. 당시 인천 소년 형무소에는 200여 명의 사상범이 수감되어 있었고, 그 중에는 표양문 인천시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이 단행되어 유엔군과 국군 해병대가 월미도를 교두보로 하여 인천 지역을 다시 점령해 가기 시작했다. 이에 퇴각하던 북한군은 인천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던 100여 명의 사상범을 학살하는 사건을 저질렀는데 인천 소년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은 함포 사격으로 인해 전화선이 두절되면서 학살을 면할 수 있었다. 1950년 9월 17일 인천 지역이 수복되면서 피난 갔던 사람들이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을 비롯한 인천 지역으로 다시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결과]

1950년 말 중공군이 참전하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 주민들은 인천 지역이 다시 북한군의 치하에 놓이는 1951년 1월 5일까지 또 한 번 피난길에 오르기 시작했고, 1951년 2월 10일 인천 지역이 다시 수복된 후 귀환하여 도시 재건에 힘을 쏟았다.

[의의와 평가]

6·25 전쟁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강대국들 사이의 역학 관계 속에서 발생한 세계사적 사건으로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 주민들은 6·25 전쟁으로 많은 고통을 겪고 도시가 파괴되는 상황에 직면했지만 재건 사업에 힘을 합하면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해 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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