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1209 |
---|---|
한자 | 平常服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창언 |
[정의]
경상북도 청송군 지역에서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입는 옷.
[개설]
경상북도 청송군 지역의 전통 사회에서는 남성은 바지와 저고리, 여성은 치마와 저고리가 보편적인 복장이었다. 당시의 의상은 길쌈을 통해 만들어 입거나, 전문 인력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나, 1960년대 이후에는 기성품이 시장을 통해 공급되어 빠르게 대체되었다.
[일상복]
과거 청송군 주왕산면의 한 마을에서는 지금처럼 다양한 종류의 옷감이 없어 부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보통 옷이 두 벌이었다. 당시의 옷은 남자의 경우 바지와 저고리, 그리고 여자의 경우 고쟁이, 치마, 적삼이 주종을 이루었다. 계절에 따라 여름에는 삼베, 그리고 겨울에는 무명을 재료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여벌이 충분하지 못한 상황에서 겨울철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때에 따라 한겨울에도 여름철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어려운 사정은 여름철에도 마찬가지였다. 파천면의 한 마을에서는 여름철 남성들은 속옷을 따로 입지 못한 채 바지와 저고리만 입었고, 여성들도 고쟁이에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생활하였다고 한다.
전통 의상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기 시작하였는데, 청송 지역에서도 1920년대 여성의 평상복 중 속옷도 편리함 위주로 변화하였다. 예전처럼 복잡하게 갖춰 입던 속옷은 앞뒤가 터진 고쟁이[‘꼬장주’라 칭했던 고쟁이]와 밑이 막힌 속곳[단속곳]으로 단순화되었으며, 이도 곧 반바지 형태의 바지로 교체되었다. 남성들은 이전부터 삼베와 무명으로 만든 반바지 형태의 속옷을 입었다.
일제강점기의 여성들은 정책적 영향으로 일본식 일바지인 ‘몸빼바지’ 착용을 강요당했다. 이 일바지를 입지 않으면 배급을 받을 수 없고 관에서 단속했기 때문에, 속옷의 앞뒤를 꿰매 물을 들여 입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성들은 점차 활동이 편리한 일본식 일바지에 익숙해졌고, 이 일바지를 생활복으로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신발은 짚신이나 고무신 등이었다. 짚신은 재료 수급이 쉽고, 삼는 기술만 있으면 몇 켤레씩 마련해 둘 수 있어 가장 대중적이었다. 게다는 버선을 신고 발을 끼우기가 매우 힘들었지만, 형태가 간단하고 제작하기 쉬워 보편적으로 이용하였다. 고무신은 배급이 나왔으나, 각 반에 배당되는 것이 적어 주로 제비뽑기를 통해 나눠 가졌을 정도로 귀하게 취급되었다.
[아동복]
아이들이 태어나면 가장 처음 입는 배냇저고리를 청송 지역에서는 ‘이란저고리’라 하며, 흰색 무명으로 만들어 백일까지 입혔다. 열 살이 되기 전까지는 남녀의 구분 없이 옷을 입히고 하의는 잘 입히지 않았다. 아이들 옷도 성인과 마찬가지로 여름에 입는 삼베와 겨울에 입는 무명옷이 전부였다. 집안의 장남 정도 되어야 명절에 새옷을 입을 수 있었다. 맏이가 아닌 아동들은 손위 형제에게 옷을 물려받아 입는 것이 보통이었다. 명절에도 새옷을 입을 형편이 되지 않을 경우 옷을 기워 입었다.
[현황]
산업화가 진전되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 서양식 기성복의 보급이 빠르게 전개되면서 기성복은 평상복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이후 한복은 평상복이 아닌 전통적인 행사나 의례에 착용하는 의례용 복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