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6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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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士亨 |
영어공식명칭 | Kim Sahyeong |
이칭/별칭 | 사겸(士兼),도겸(道謙),독수헌(獨秀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출생 시기/일시 | 1541년 - 김사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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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73년 - 김사형 문과 급제 |
출생지 | 의성 사촌마을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점곡길 |
거주|이주지 | 의성 사촌마을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점곡길 |
거주|이주지 | 진보현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
외가|처가 | 안동대도호부 서지리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 |
부임|활동지 | 화왕산성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
묘소|단소 | 둔음산 술좌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 |
성격 | 문신|의병장 |
성별 | 남 |
본관 | 안동 |
대표 관직 | 직장 |
[정의]
조선 후기 청송에 정착한 문신이자 의병장.
[개설]
김사형(金士亨)[1541~?]은 형 김사원(金士元)[1539~1601]과 동생 김사정(金士貞)[1552~1620]과 함께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에서 기반을 마련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당시 동생 김사정과 아들 김한(金澣)과 함께 창녕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병진에 참여하였다. 그 이후 가족들을 이끌고 진보현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겸(士兼)·도겸(道謙), 호는 독수헌(獨秀軒). 의성 사촌의 입향조인 김자첨(金子瞻)[1369~1454]의 6대손이다. 5대조 할아버지는 사직(司直)을 지낸 김효온(金孝溫)이며, 고조할아버지는 북평사(北評事)를 지낸 김극해(金克諧)[1440~?]이다. 증조할아버지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1468~1563]는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의 외할아버지이다. 할아버지는 참봉(參奉)을 지낸 김당(金溏)이다. 아버지는 김세우(金世佑)[1514~1580]이고, 어머니는 김만겸(金萬謙)의 딸 의성김씨(義城金氏)이다. 형은 김사원이고, 동생은 김사정이다. 김사형의 부인은 부장 안수랑(安遂郞)의 딸 숙인(淑人) 순흥안씨(順興安氏)이다. 아들 김한(金澣)[1583~1652]은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활동 사항]
김사형은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1520~1588]의 문하에서 지헌(芝軒) 정사성(鄭士誠), 옥봉(玉峯) 권위(權暐), 오봉(梧峰) 신지제(申之悌), 무의공(武毅公) 박의장(朴毅長), 동생 김사정 등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이들은 모두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활약하고, 이후 퇴계학파의 일원으로 학문과 지방관으로 선정을 베풀어서 안동·의성·영해 등지에서 명성이 높았다. 또한 형 김사원, 동생 김사정과 함께 종택(宗宅)과 만취당(晩翠堂)을 창건하는 등 의성 사촌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김사형은 1573년(선조 6)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을 역임하였고, 정유재란 당시 동생 김사정, 아들 김한과 함께 곽재우 의병진에 참여하여 화왕산성에서 군무에 협조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이 『창의록(倡義錄)』에 실려 있다. 그 이후 아들 김한과 함께 가족들을 이끌고 진보(眞寶)로 이거(移居)하였다.
[학문과 저술]
유년기에는 형 김사원과 함께 증조할아버지 김광수에게 가학(家學)을 전수받았으며, 이후 유일재 김언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묘소]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 둔음산(屯音山)에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