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6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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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庸 |
영어공식명칭 | Cho Yong |
이칭/별칭 | 조중걸(趙仲傑),문정(文貞),송정(松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위은숙 |
[정의]
고려 후기 및 조선 전기에 활약한 청송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진보(眞寶). 호는 송정(松亭), 시호는 문정(文貞). 아들은 조담(趙聃), 조치(趙恥), 조이(趙耳)가 있다.
[활동 사항]
조용(趙庸)[?~1426]은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전교주부(典校注簿)·삼사도사(三司都事)에 제수되고, 계림부판관(鷄林府判官)으로 나가 고을을 잘 다스려 치적을 쌓았다. 1389년(공양왕 원년)에 세자시학(世子侍學), 1390년(공양왕 2) 정월에 사설서령(司設署令), 4월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는데, 대사헌이었던 김사형(金士衡) 등과 더불어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사건에 관련되었지만 처벌받지 않은 우현보(禹玄寶), 권중화(權仲和), 장하(張夏), 경보(慶補) 등을 탄핵하여 유배보냈다. 1392년(공양왕 4) 7월 공양왕이 정몽주가 제거된 후 이성계가 자신을 해할 것을 염려하여 동맹을 맺고자 하였는데, 이때 사예(司藝)였던 조용은 왕의 명령으로 이방원(李芳遠)과 함께 그 맹세문의 초고를 만들어 바쳤다.
조선건국 초기에는 병으로 성균좨주(成均祭酒)를 사임하고 보주(甫州)에서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1398년(태조 7) 7월에 간의대부(諫議大夫)에 발탁되고, 9월에 우간의(右諫議)로서 이조전서(吏曹典書) 이첨(李詹), 전지선주사(前知善州事) 정이오(鄭以吾)와 함께 경사(經史)에 기재된 임금의 마음가짐과 정치에 관계되는 것만을 찬집하여 상절(詳節)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쳤다. 또한 12월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있을 때는 좌정승 조준, 겸대사헌(兼大司憲) 조박(趙璞), 정당문학(政堂文學) 하륜(河崙), 중추원학사(中樞院學士) 이첨(李詹), 봉상소경(奉常少卿) 정이오(鄭以吾) 등과 함께 『사서절요(四書切要)』를 찬술하여 임금에게 바쳤다.
1401년(태종 1) 5월에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이 되고, 다음 해 2월 성균관대사성으로서 생원시의 시관이 되었다. 1402년(태종 2) 7월에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 12월에는 형조전서(刑曹典書)에 임명되었다. 1403년(태종 3) 12월에 성균생원 60인의 요청으로 검교한성윤 겸 성균대사성(檢校漢城尹兼成均大司成)에 제수되었다. 1406년(태종 6) 8월 세자빈객에서 해임되었다가, 9월 다시 우부빈객에 제수되었다, 1410년(태종 10) 8월에 검교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 세자빈객 겸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1414년(태종 14) 8월 예문관대제학이 되었으며, 다음 해 정월에 성절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5년(태종 15) 12월에 예조판서가 되고, 1417년 5월에 다시 예문관대제학, 1418년(태종 18) 정월에 우군도총제가 되었으며, 4월에는 예문관대제학 행성균대사성이 되었다. 1421년(세종 3) 8월에는 검교의정부찬성을 지냈는데 집안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토지 30결과 미두(米豆) 20석(石)을 하사받았다. 1422년(세종 4) 6월에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로 치사(致仕)하였다.
[학문과 저술]
1398년(태조 7) 12월에 조준(趙浚), 조박(趙璞), 하륜(河崙), 이첨, 정이오(鄭以吾) 등과 함께 『사서절요』를 찬술하였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에 있는 상현사(尙賢祠)에 배향되어 있다. 상현사는 도정서원(道正書院) 내 사당으로 1640년(인조 18)에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