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3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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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獨立運動後援義勇團-軍資金募集事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김영범 |
[정의]
1920년부터 1922년까지 경상북도 청송군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군자금 모집 활동.
[개설]
중국 만주(滿洲) 서간도(西間島)의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지원하고자 1920년 9월경 경상북도 김천에서 결성된 비밀결사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朝鮮獨立後援義勇團)이 1922년 12월 일제 경찰에 발각될 때까지 경상북도 일원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는데, 그 과정에 단원 이종국(李鍾國)과 이정희(李庭禧)가 청송군의 부호 5인에게서 군자금을 거두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1919년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단원으로 활동하다 경찰에 의해 수배되자 만주로 망명하였던 경상북도 영주 출신의 김찬규(金燦奎)는 지린성[吉林省]에서 만난 안동 출신 독립운동가 김응섭(金應燮)으로부터 귀국하여 군자금을 모아줄 것을 요청받음과 함께 서로군정서 총재(總裁) 명의의 위임장과 군자금 사령서(辭令書), 경고문, 사형선고서 양식을 건네받았다.
권총 1정, 탄환 14발과 함께 그 문서를 갖고 밀입국한 김찬규는 1920년 9월경 김천군 봉산면 예지동(禮智洞)의 농민 이응수(李應洙)를 찾아가 발의하고, 이응수의 집에서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 조직을 발족시켰다. 군자금 모집과 단원 규합에 목적을 두었고, 당면 목표는 자체 군자금 조달을 위한 철공소 설립이었다. 경상북도 단장은 문경 출신의 신태식(申泰植), 경상남도 단장은 김찬규가 맡기로 하고, 이응수가 총무국장을 맡았으며, 실행 부서로 군무국(軍務局)과 재무국(財務局)을 두어 총장(總長)을 선임하였다.
[경과]
1920년 5월경 ‘군정서 특파원’을 자칭하는 양한위(梁漢緯)로부터 군자금 1만 원 제공을 요청받은 바 있는 안동의 이종국은 청도군 매전면의 친족 이정희와 공모하여, 그해 10월경 청송군 현동면 창양동(昌陽洞)의 자산가 조정식(趙定植)에게 군자금 사령장을 우송하였다. ‘독립운동 자금 5만 원을 대구 달성공원으로 가지고 오라. 응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조정식은 아들 조성우(趙性佑)를 이종국에게 보내어 동정을 살피게 하였고, 11월에 이종국과 이정희가 조정식의 집으로 가서 “우리는 이 협박장의 발송자와 관계 있으니, 위해(危害)를 면하려 한다면 그 운동비로 3만 원을 제공하라. 불응하면 불원간에 협박장이 집행되어 위해가 가해질 것”이라고 말하였고, 결국 5천 원 약속어음 2장을 받아냈다.
1년 후인 1921년 11월에 이종국과 이정희는 청송군 파천면 지경동(地境洞)의 조규한(趙圭漢), 부남면 감연동(甘淵洞)의 황보훈(皇甫薰), 파천면 덕천동(德川洞)의 심호택(沈琥澤) 외에 영천군 신녕면 화남동(華南洞)의 권중면(權重沔) 각각에게 ‘신정부 재무원’ 이시연(李時淵) 명의로 사령서를 보냈다. ‘독립자금 5만 원을 대구부 명송정(明松町) 이정희의 집으로 가지고 오라. 응하지 않으면 군대를 보내겠다.’는 내용이었다. 즉시 호응이 없자 두 사람은 1922년 1월에 조규한, 황보훈에게 곽종협(郭鍾協)이라는 가명으로 독촉장을 보냈다. 그럼에도 어느 누구도 응하지를 않았다.
같은 해 2월에는 현동면 창양동의 조병식(趙炳植)에게도 ‘독립군자금 2만 원을 대구부 명송정의 박경중(朴慶重)[이정희의 사위인 박경종(朴京鍾)을 말함]의 집으로 가지고 오라. 응하지 않으면 군대를 보내겠다.’는 내용의 사령서를 보냈지만, 역시 응함이 없었다.
[결과]
경상북도 청송 외에도 경산·안동·영일·군위·영덕 지역과 경상남도 창녕 등지에서 전개되고 있던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의 활동 정황은 1922년 11월에 일경에 포착되어, 11월말부터 한 달 동안 세 차례에 걸쳐 40여 명의 단원 및 관련자들이 붙잡혀 갔다. 그중 30명가량이 경상북도 출신이었는데, 청송인은 한 명도 없었다. 또한 청송의 부호로서 군자금 지원 요구에 응한 이가 없었고, 조정식만이 강압에 못 이겨 1만 원의 약속어음을 냈던 것이다.
[의의와 평가]
경상북도 지역을 주 무대로 하여 2년여 동안 군자금 모집운동이 비밀리에 대담하게 전개되었다. 그 과정에 특히 청송군 부호들에게 자금 제공이 집중적으로 요구되었는데, 별다른 실효를 보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