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333
한자 -池戰鬪
이칭/별칭 오누이못전투,오누이전투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6년 4월연표보기 - 오누지전투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06년 4월연표보기 - 오누지전투 종결
전개 시기/일시 1906년 4월 - 진보의진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오누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파천면 어천까지 추격, 섬멸
발생|시작 장소 오누지전투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진안리 지도보기
종결 장소 오누지전투 -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어천리 지도보기
성격 의병 전쟁
관련 인물/단체 이현규|진보의진

[정의]

1906년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진안리오누지에서 벌어진 진성의진과 일본군의 전투.

[개설]

1906년 4월 이현규(李鉉圭)가 이끄는 진성의진(眞城義陣)이 장수령전투(長水嶺戰鬪)에서 패하고 도주하는 일본군 헌병 오장(伍長)[하사 계급] 무토[武藤] 부대를 오누지에서 격파하고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어천(魚川)까지 추격하여 섬멸하였다.

[역사적 배경]

1905년 11월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에 온 민족이 분노하여 일어났다. 이때 국권 수호를 외치는 애국지사들은 크게 두 갈래의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일제 침략 세력을 직접 무력으로 몰아내고자 한 의병 전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리도 실력을 양성하여 국력을 기른 뒤 일본 세력에 대항해야 한다고 한 계몽운동이었다. 한말 국권수호운동은 이렇게 두 가지 큰 흐름으로 나타났다.

[경과]

1905년 11월 을사늑약에 격분한 경상북도 영양군 유생(儒生) 이현규는 동지들과 연락하여, 그해 11월 하순경 청송군 주왕산(周王山) 대전사(大典寺)에 모였다. 이들은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고 각지에 격문을 돌려 군사를 모집하였다. 약 달포 만에 300여 명이 모였다. 그해 12월 중순 울진 불영사(佛影寺)로 들어가 강원·경상 각지에의 군사를 모집하였다. 이렇게 여러 지역에서 모인 병사들은 이현규를 안동·진보·청송·영양 4군 의병대장(義兵隊將)으로 추대하고, 4군을 중심으로 다시 군사와 무기 및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모집된 군사가 500여 명이나 되자, 이들을 청송 주왕산과 봉화 청량산(淸凉山)에 나누어 군사 훈련을 시켰다. 이듬해인 1906년 2월 의진을 편성하였다. 대장(大將) 이현규, 중군장(中軍將) 유시연(柳時淵), 도포장(都砲將) 김대규(金大圭), 소모장(召募將) 신형일(申衡一), 도포수(都砲手) 권대성(權大聲), 집사(執事) 조완이(趙完伊) 등으로 부서를 정하고 의진 이름을 진성의진이라 하였다.

의진은 1906년 2월부터 청송·진보·영양·영해 등 여러 곳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많은 성과를 거둔 뒤, 그해 4월 청송으로 진군하였다. 청송군 진보면 장수령에서 강원·경상 지방의 의병 소탕 책임을 맡고 있던 일본군 헌병 오장 무토와 경상북도 지사 마쓰오[松尾]가 이끄는 일본군 부대와 교전하게 되었다. 밀고 밀리는 전투가 10여 차례를 거듭하였다. 의진의 기세에 밀린 일본군은 퇴각하였고, 의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추격하였다. 도주하던 일본군은 청송군 진보면 진안리오누지[오누이못]에 이르러 제방(堤防)을 이용해서 강력한 저항을 하였다.

쌍방 간의 공방전은 하루 종일 계속되었고, 사상자도 늘어났다. 조완이 집사가 전사하고, 이현규 대장과 김대규 군량도감(軍粮都監)도 중상을 입었다. 일본군도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격전은 오누지를 피로 물들게 하였다고 전한다. 전의를 상실한 일본군은 다시 청송군 파천면 어천으로 도주하였다. 이에 퇴로를 예상하고 매복하였던 의병들이 총공격을 폈다. 오누지에 이은 어천전투(魚川戰鬪)에서 일본군 헌병 오장 무토와 경상북도 지사 마쓰오를 비롯해서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무토 오장이 이끄는 부대가 분대 규모였다면 일본군은 거의 섬멸당하였던 셈이다.

[결과]

오누지전투 결과는 일본군 헌병 오장 무토, 경상북도 지사 마쓰오를 포함한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의병 측에서도 집사 조완이가 전사하고 대장 이현규와 군량도감 김대규 등이 중상을 입었다. 의진은 승리한 후 진보로 개선하여 진보현감(眞寶縣監) 이중철(李中哲)과 청송군수(靑松郡守) 안기준(安基準)의 치하와 격려를 받았다. 그 뒤에 일본군은 오누지 둑에 무토의 전적비를 세웠는데, 광복 후 이를 부숴버리고 그 자리에 이하현선생기념비(李夏玄先生紀念碑)를 세웠다가 얼마 후 오누지 맞은편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의의와 평가]

오누지전투는 국권 수호의 의기(義氣)로 무장한 의병진과 우세한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의 격전이었다. 이 전투는 한말 국권회복운동에서 의병 투쟁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한국군 하사 계급에 해당하는 일본군 헌병 오장이 거느린 일본군 부대를 의병이 섬멸한 것이다. 진성의진이 감행한 오누지전투는 한말 민족운동사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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