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촌 이상사회의 건설, 판미동 고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1640
한자 鄕村 理想社會의 建設, 板尾洞 故事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가평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주혁

[정의]

경기도 가평군 하면 능재말고개에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향촌자치를 실현한 마을의 일화와 의미.

[개설]

판미동 고사는 신석(申奭)이 1674년 가평군 하면의 능재말고개 부근 협곡지대에 조성한 이후 100여 년간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향촌자치 실현을 목적으로 유지 및 운영되었다.

신석은 누구인가

신석(申奭)[1650~1724]의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호이(浩而)이며, 신숙주(申叔舟)의 다섯째 아들인 소안군(昭安君) 신준(申浚)의 후손이다.

원래 경기도 양주 구성말[현 의정부시 고산리]에서 대대로 살다가 1674년(현종 15) 가평군 하면 조종천 상류의 판미동(板尾洞)으로 이주하여 약 100년 동안 3대가 거주하였다. 흉년이 들면 큰 가마솥에 죽을 쑤어 굶주리는 인근 주민에게 먹였고, 여씨향약과 해주향약을 참고하여 판미동 동헌을 만들어 마을을 교화하였다.

조선 양반 사대부의 고뇌- 이상과 현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지나간 시기에는 중앙의 당파싸움에 지친 사대부들이 머물며 위안을 삼아 현실을 벗어나려는 사대부들이 많았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현실에서 도덕적 이상의 완전한 실현과 자아의 충족감을 동일시하였다. 사대부들이 현실과 자연을 대립 공간으로 본 것은 자아는 깨끗하고 이성을 따라 분별하지만, 현실은 혼탁하고 시비 분별이 명확하지 못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즉 자연은 본래 고통스러운 현실과는 다른 순수 공간으로 청정함과 원초적 생명력이 있다고 보았다. 현실 삶이 고통스럽고 괴로울수록 자연에 대한 지향 의지가 더 강하게 표출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실과 자연에 대한 대립적 인식에서 비롯된 괴리감이 결국 자연에 귀의하여 무위(無爲)를 의지화하고 방일(放逸)을 행동화함으로써 노장적(老莊的) 현실 부정의 태도에 몰입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사대부들의 도피처로서의 적당한 장소이자 이상과 현실을 고민할 수 있는 곳은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특히 남·서인의 당쟁이 격화되었던 18세기 이후에는 북한강과 남한강에서부터 한강 하류 통진 부근 내의 땅에 주목하였다. 그 중에 어느 곳을 골라 당색을 초월하여 북한강 유역에 흩어져 살기를 원했다. 사대부들은 그곳에서 나름대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정착하거나 언젠가 정계로 되돌아가기를 기대하며 은둔하고 있었다.

다수의 사대부가 풍치가 빼어난 경기도 북부의 산하에 주목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오늘날 양평군 양수리 부근과 가평군 조종[현 상면, 조종면], 설악면 등은 당파싸움에 지친 사대부들에게 위안과 휴식 그리고 새로운 기대감을 제공해주었다.

판미동 고사의 실제와 이상

17세기 조선 사대부들의 현실적 도피처이자 이상향으로 기대감을 충족시킨 곳은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다. 그 중 하나가 오늘날 경기도 가평군 하면의 능재말고개에 1674년 건설된 판미동 고사이다.

1674년에는 해적이 침입할 것이라는 소문이 한양 전역에 퍼져, 많은 사람들이 한양을 떠났다. 신석(申奭)도 한양을 떠나 판미동에 자리를 잡았다. 평소 사냥을 즐기던 신석의 외사촌 윤세웅이 경치가 수려하고 피난하기 좋은 곳이라면서 판미동을 추천하자, 신석판미동 지대를 사들였고 홀어머니도 계셨기 때문에 선뜻 이주할 생각을 했던 것이다.

신석이 터를 잡은 곳은 깊은 산골로, 사방이 깊은 산으로 막혀 있어서 현령(縣令)의 통치도 미치기 어려웠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보존되어 있었고, 피난하기에도 그만이었다. 이곳에서 신석은 친지들과 함께 자신들만의 약속, 즉 동헌(洞憲)을 정한다.

신석은 가족과 친족을 이끌고 판미동에 정착하여 집과 사당을 짓고, 전답을 일구어 소규모 향촌사회를 건설하였다. 신석판미동에 실제로 사대부들이 꿈꾸던 이상향을 건설했고, 마을은 100여 년 동안 유지됐다. 정파싸움에서 벗어나, 자치적인 향촌의 이상사회를 산골에서 재현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신석은 평소 꿈꾸던 유교적 이상세계를 좀 더 작은 규모의 공동체에서 현실로 보여준 것이다.

신석판미동을 운영하는 기본 원칙, 운영안 등은 동헌에 집약되었다. 동헌(洞憲)은 마을 구성원간의 조직으로 족계(族契)·동계(洞契)·동규(洞規)·동약(洞約) 등으로도 불린다. 동헌이 언제부터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여말선초 자연촌의 성장과 함께 이미 동헌의 시원적인 형태는 이루어졌을 것이다. 15세기 후반에 이르면 이미 사족이 중심이 되었던 촌락 단위 동계의 존재가 여러 자료를 통하여 확인된다.

16~17세기의 동헌들은 이같은 일련의 사족지배체제 변동과 연결되면서 특유의 성격을 갖게 되었는데 기존 촌락사회의 운영원리를 바탕으로 상·하 동민(洞民)을 결속시켜, 사족적 신분 질서를 재강화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성격을 반영하는 형태가 바로 상·하합계[상층민과 하층민을 결합]였던 것이고, 이를 통해 사족들은 기층의 민중조직을 포용하고 흡수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사대부가 꿈꾸었던 이상향]

개인이 꾸는 꿈은 무궁무진하다. 특정 시기 누군가가 이상향을 꿈이 아닌 현실에서 직접 시도했다는 점은 현재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돌아간다면 유교 이념을 체현한 사대부이자 지식인들을 수없이 볼 수 있다. 그들이 살고자했고, 실제 살았던 판미동의 의미는 지상에 건설된 낙원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경기도 가평군 하면의 능재말고개에 펼쳐졌던 판미동고사는 실제 어떤 세상을 함의하고 있었는지 쉽게 알기는 어렵다.

대부분은 한유(韓愈)의 무릉도원을 이상향이라 여겼고, 곧 노자의 무위무치 사상과 직결된다. 여기서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억압과 수탈 같은 부당한 통치가 없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누구나 땀 흘려 일해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세상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옛 사람들 다수는 현실에서 이루기 힘든 꿈 속의 일로 보았을 뿐이다.

보다 구체적인 무릉도원의 모습은 우선 진나라와는 다른 세상을 의미할 것이다. 진나라와 같은 학정이 없고 가혹한 수탈이 없으며 과도한 강제 노역이 없는 것은 물론 전쟁도 없는 세상이 아니었을까. 사대부들이 바라던 세상은 고대광실 같은 집에서 놀고 먹으며 금은보화로 치장하는 세상이 아니었다. 그저 모두 같이 땀 흘려 나무를 심어 가꾸고 농사도 지어서 밥을 먹고, 닭이나 개 등의 가축을 기르고 이웃과 함께 조용히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이야말로 세속에서 꿈꾸던 이상향인 것이다. 그런 세상을 희망하는 것은 사람만의 특권이다. 또한 꿈은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 살아갈 힘을 제공해주는 에너지원이 될 수도 있다. 오히려 바람과 희망이 없는 사람이야말로 현실 속에 안주하는 가장 나약하고 위험한 존재인 것이다.

판미동고사에서 우리 조상들이 꿈 꾼 사회는 사람들이 함께 일하면서 노동에서 오는 풍요와 즐거움을 다같이 누리는 세상을 가리킨다. 인간이 자연을 존중하고 절제하면서 이용하면 자연도 그 정성에 충분히 감응하는 세상이 바로 이상 공간이다. 백성들이 속세를 떠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유가 국가권력에서 비롯된 폭정에 대한 도피라는 점도 분명하다.

2000년대의 한국 현실은 어떨까. 탈조선, 헬조선, 고조선 이래 최대 부정, 이민 갈까 등의 문구가 난무한다. 각자가 맞고 있는 현실은 다 다르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판미동고사가 현실화되었던 당시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매우 다르다. 자연환경도, 삶의 조건도,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것이 전혀 없는 다른 세상이다. 시대 조건은 다르지만 그 곳에 살았던 그리고 살고 있는 사람들의 세계관은 특별한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각자의 그곳에서 어떤 사람은 꿈도 꾸지 못하고, 누군가는 꿈만 꾸고, 다른 이는 꿈꾸면서 대안을 찾고의 차이가 날 뿐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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