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독립운동의 상징 북면 싸리재 3·1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1624
한자 加平獨立運動-象徵北面-三一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2리 싸리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정용칠

[정의]

1919년 3월 15일 경기도 가평군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

[경성에서 전해지는 3·1운동 소식]

1919년 3월 1일 경성에서 울려버진 독립만세의 함성은 고종의 인산을 보러 상경한 각 지역의 사람들에 의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이날 인사동 태화관 앞에서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을 기다리고 있던 가평 출신의 인사가 있었으니 그들은 정한교(鄭漢敎), 신숙(申肅)[이명:태연(泰練)], 민영순(閔泳純)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천교도측 인사들로써 만세시위로 인하여 당일 오후 3시경 일본경찰에 의해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었으나 만세운동과의 연관성을 찾지 못하여 오후 8시경 풀려나왔다. 이들은 오후 9시경 함께 화개동[현 소격동]에 있는 정한교의 집에 모여 사태가 변하는 것에 대해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 고종의 인산을 확인하러 상경하였던 이규봉(李圭鳳)은 한밤중에 정한교의 집을 찾아온다. 이규봉은 가평에서 한학을 하는 선생으로 앞의 세 명은 모두 이규봉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었다. 이규봉은 서울시내 종로에서 사람들의 만세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 제자들의 안부를 물을 겸 이들을 찾아온 것이다. 당시 『독립신문』을 편집하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데 일조하였던 이들은 한밤중에 방문한 이규봉에게 만세운동의 소식을 알리고 가평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부탁하였다. 제자들의 간곡한 부탁과 만세운동의 대의에 동의한 이규봉은 제자들을 대신하여 가평 지역에 소식을 전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가평으로 가평으로]

이규봉은 제자들과 헤어지고 조선독립선언서 2매와 『독립신문』 1매를 가지고 곧바로 동대문 쪽을 향하여 망우리를 넘어 가평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망우리 고개를 지나 사람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짐을 풀러 도포를 걸쳐 점잖은 선비로 보일 수 있도록 하였다. 마침 고개 아래의 묵관리에 도착하니 날이 어두워져 외종(外從) 김백현(金伯賢)의 집에 들러 저녁을 먹고 이웃집 사랑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아침 일찍 떠나려고 하였으나 비가 와서 정오경에 길을 나섰다. 마치고개를 넘고 다시 야연리에 이르니 날이 저물어 유숙을 하였는데 주점가에는 방이 없어 방을 구하니 외사(外舍)는 없고 내사(內舍)만이 있어 또 하룻밤을 보내었다. 다음날 새벽 청평을 지나 상천리 홍선달(洪先達)의 집에 들어가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하고 가평읍에 당도하여 김재영(金在爃)의 집을 찾아갔다. 김재영은 과거에 을미의병에 참여하였던 인물로 이규봉은 그의 사랑에서 자제를 훈학한 경험이 있어 안심하고 찾아갔던 것이다.

[조용히 퍼지는 만세운동의 소식]

김재영의 집에 도착한 이규봉의 품속에는 경성에서 출발할 때 가지고 온 조선독립선언서 2매와 『독립신문』 1매가 들어있었다. 김재영에게 이를 보여주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상의하니 김재영은 가평우편소에서 우편물을 배달하는 조카 김정호(金定鎬)를 데리고 와서 같이 상의하였다. 고종의 인산 소식과 경성에서 발생한 3·1운동을 전해들은 이들은 크게 놀라는 눈치였으나 이내 선언서의 내용을 확인하고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김재영의 집에서 나온 이규봉북면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던 중 노루목고개를 넘어 이곡리 들판을 거쳐 목동내 다리를 건너다가 수원농림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최종화(崔宗和)를 만나 또 다시 경성에서 일어난 3·1운동 소식을 전하였다. 이 때 죽둔리 일본헌병 주둔소를 지나던 중 일본순사의 검문을 받기도 하였으나 이규봉의 가평 내 지위가 있어 간단한 문답만을 마치고 통과하게 되었다.

마침내 북면 목동리 싸리재에 있는 집에 도착하자 싸리재 서당에 있던 장남 이윤석(李胤錫)정흥교(鄭興敎)[이명 興龍]가 그를 맞이하였다. 이규봉에게 정한교 등과 만나일과 경성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소식을 들은 두 사람은 가평에서 만세운동의 소식을 전달하고 주도할 것을 결심하고 이규봉과 함께 거사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이규봉은 집에 있는 등사기를 이용하여 가져온 조선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기로 하였다. 이윤석정흥교에게는 이곡리최종화를 찾아가 일을 알려주고 동지들을 비밀리에 규합하도록 했다. 서당 동료는 물론이고 천도교와 기독교든 참여하고자 하는 이들과는 공모는 하되 절대 비밀을 발설하지 않도록 당부하였다. 이윤석은 죽둔리와 이곡리 일대를 맡았고 정흥교소법리화악리 일대를 담당하였다. 이 밖에 이규봉은 선비들이 모여 시를 짓고 노는 회합인 아회(雅會)를 개최한다는 말을 듣고 참가하여 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하였고, 장호리(張浩利)·장기영(張基榮), 둘째 사위인 최인화(崔仁和) 등은 이에 동의하여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최종적으로 거사일을 3월 15일 정오로 확정짓고 각 지역의 담당자는 당일 오전에 죽둔리 면사무소 앞으로 모인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 각자 비밀을 지킬것과 천도교 및 기독교인을 포섭하고 태극기를 수 백개씩 제작하여 만세 당일에 사용할 것 등을 약속하였다. 또한 각 지역의 서당에서는 문창호지를 100장씩을 거두어 선언서를 복사할 때 쓰자고 당부하였다.

[여성들의 태극기 제작과 비밀통문 배포]

이규봉의 장남인 이윤석은 태극기 제작을 담당하였고, 이를 동료인 김규하(金奎夏) 등과 논의하였다. 김규하는 집에서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글을 읽을 때 안방에서 부인들이 태극기를 제작하는 것을 건의를 하였다. 남성들이 글을 읽으면서 모임을 진행하므로 외부에 보이고 실제로는 여성들의 참여로 만세운동에 참여할 태극기를 제작한다는 전략이였다. 이렇게 하여 3월 13일까지 비밀리에 약 1,800여개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이처럼 태극기를 제작할 동안 구역을 분담하여 동지들을 모으는 것을 담당한 사람들은 각 지역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인원을 당일 참가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정효섭(丁孝燮)북면의 천도교인들을 모으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고, 정석조소법리 남종마을 일대에서 사람들을 모으는데 역할을 하였다.

이곡리최종화이규봉의 집에서 독립선언서 등사를 작업하였다. 이렇게 진행된 작업에 우체배달부였던 김정호는 편지를 들고 다니면서 군내면 지역에 태극기를 배포하고 사람들에게 비밀리에 만세운동을 참여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전달하였다.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이틀 전인 13일 이윤석은 거사를 전 군민에게 알리기 위해서 통문(通文)을 돌리기로 결심하고 벌멱골에 있는 등사기로 약 500매를 복사하여 3월 14일 밤을 기하여 각 집에 배부하도록 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작금 세계 만국공회에서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타국에 속해 있는 모든 나라는 독립하기로 되었으며, 이 선포가 있은 후 경성에는 우리의 민족대표가 독립을 선포했고, 시민과 학생들은 연일 계속하여 대한독립의 만세를 외치고 있다. 이에 우리 가평에서도 대한독립의 만세를 부르기로 결정하였으니 오는 음력 2월 14일 오전 9시까지 집결하기 바란다. 추신 : 이 통문을 비밀로 이웃에도 알려 동참하게 할 것. 대한독립만세’

[북면에서 울려퍼지는 만세소리]

1919년 3월 15일 오전 9시, 전날에 통문을 받은 사람들과 각 지역별로 전한 소식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읍내에 모여 수 백명이 되었다. 가평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한 주도자이며 지역의 어른으로서 이규봉은 의관을 갖추어 입고 나섰고 많은 주민들은 그를 따라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장남인 이윤석은 대형 태극기를 가지고 행진하였으며, 장기영·정흥교·최인화·이만석·최종화 등은 손에 태극기를 가지고 선두에 서서 만세를 부르짖으며 북면 백둔리에서 이곡리까지 사람들과 함께 이동하였다.

가평군청에 도착한 군중들은 이윤석이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규봉이 올라 만세삼창을 하자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소리로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군중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한편은 공립보통학교로, 한편은 군내면사무소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시위군중의 수는 점차 불어났으며 공립보통학교 쪽에서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을 인솔하고 나와 시위 군중들을 맞이하였고 헌병·헌병보조원·면장 등은 군중들에게 해산할 것을 명하였지만 군중들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저녁 8시 무렵 시위가 잦아드는 기세가 보이자 헌병들은 주모자를 수색하여 이윤석 등 10여명을 헌병대에 가두었다. 이에 군중들은 잡혀간 사람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3월 16일 아침 다시 모인 수 백명의 군중들은 잡혀간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하여 서낭당고개에 모여들었다. 장기영 등은 헌병분견소에 가서 붙잡힌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할 것을 주장하였고 군중들이 고개 아래로 내려가자 헌병들이 군중을 해산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헌병들은 장기영을 체포하였고 군중은 더욱 거세게 항의하였으나 일본측 헌병의 지원이 가세되었다. 3월 15일부터 16일까지 이틀동안 수 백명의 가평군민들이 참여하여 진행된 북면 만세운동으로 가평경찰서에 잡혀간 사람들은 약 70여명에 이르렀다. 이중 28명은 징역 6개월~3년형을 선고받아 일부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고 일부는 경찰서에서 태형을 받아 맞고 풀려났다.

이렇듯 3월 1일 경성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고종의 인산을 참여한 이규봉에 의해 가평에 전달되었고, 가평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종교인들과 여성, 학생 등 각계 각층의 가평군민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수 백장의 태극기와 조선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만세운동을 기획하였고, 이규봉의 거주지인 북면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시작되어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참고문헌]
  • 『가평독립운동사』(가평향토문화추진협의회,1984)
  • 『가평군지』(가평군사편찬위원회, 2006)
  • 「정성교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9년 4월 26일)
  • 「정성교 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19년 7월 14일)
  • 「정성교 판결문」(고등법원, 1919년 9월 25일)
  • 「장응옥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9년 5월 9일)
  • 「권성남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9년 5월 15일)
  •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sam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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