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774
한자 趙準熙
영어공식명칭 Jo Junhui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가평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임현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8년연표보기 - 조준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4년 - 조준희 동몽교관 역임
활동 시기/일시 1897년 - 조준희 공릉령·삭녕군수를 역임
활동 시기/일시 1897~1902년 - 조준희 가평군수 역임
몰년 시기/일시 1908년연표보기 - 조준희 사망
부임|활동지 삭녕군 - 경기도 삭녕군
부임|활동지 가평군 - 경기도 가평군
성격 문신
성별 남성
본관 양주
대표 관직 가평군수

[정의]

조선 후기 경기도 가평군에서 군수를 역임한 문신.

[가계]

조준희(趙準熙)의 본관은 양주(楊州)다. 1868년에 출생하여 1908년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조준희는 1891년 감시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1894년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냈다. 1897년 5월 공릉령(恭陵令)·삭녕군수(朔寧郡守)를 역임하였으며, 같은 해 8월부터 1902년까지 가평군수를 지냈다. 본래 가평군수 임기는 종료되어야 했다. 그러나 1901년 내부 대신 이건하(李乾夏)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영평군수(永平郡守) 홍태윤(洪泰潤)은 6년 동안 관직을 맡고 있으면서 온갖 방면에 대해 조치를 잘 취했는데 그에 관한 여론이 긍정적이어서 홍태윤이 떠나가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으며, 가평군수 조준희는 백성을 사랑하여 은택을 베풀고 공평하게 송사를 심리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건하는 이 두 수령의 임기는 비록 끝났지만 마땅히 연장시켜야 한다고 보고하였으며, 고종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조준희는 6년동안 가평 지역의 수령을 맡을 수 있었다. 1902년에는 가평군수 겸 어진집사관(御眞執事官)을 맡아 반숙마 1필을 받았다. 같은 해 말 가평군수 자격으로 황명을 받들어 궁내부 특진관 조병세(趙秉世)에게 전유하였는데, 당시 조병세가 앓아 누워 움직일 수 없다는 보고를 올렸다.

조준희는 가평군수를 마친 후 공주군수(公州郡守)에 임명되었으나, 1904년 수령들의 나태함을 탄핵하는 상소에서 조준희도 탄핵을 받았다. 상소문 내용은 그 해 여름 아전들의 소요가 있었고, 그것이 조준희의 잘못이 아님에도 그 사건 이후에 아전들이 현지에 복무하지 않으려 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결국 조준희는 이 탄핵으로 징계를 받았고, 이듬해인 1905년에 사면되었다.

[학문과 저술]

가평군수로 재임하던 6년 중 1899년 5월, 『가평군읍지』를 편찬하였다. 이때 편찬한 읍지의 글은 총 4쪽 분량으로 서울과의 거리, 인구 수, 상환미의 양, 전답의 양, 가평군 내의 산과 하천, 나루터, 사찰, 장시, 제단 등에 관한 기록이 간결하게 적혀 있다. 또한 「지도성책(地圖成冊)」 편에는 가평군의 지리를 담은 지도를 부록하였다. 각 책의 끝에는 가평군수 조준희의 이름과 그의 직인이 찍혀 있다. 현재 「지도성책」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영인한 『경기도읍지』[1988] 중 2권의 가장 앞의 목차에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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