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758
한자 鄭錫祚
영어공식명칭 Jeong Seokjo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가평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조범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1년 12월 22일연표보기 - 정석조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5~16일 - 정석조 북면 만세시위 참여
출생지 정석조 출생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소법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정석조 거주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소법리 지도보기
활동지 정석조 북면 만세시위 참여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지도보기 일대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북면 만세시위 참여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가평군 출신 독립운동가.

[가계]

정석조(鄭錫祚)의 본관은 경주이다. 아버지는 정태규(鄭泰圭)로, 1881년 경기도 가평군 북면 소법리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은 각지로 전파되었으며, 가평에서도 3월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가평군 가평읍에서 사숙을 운영했던 이규봉(李圭鳳)은 고종의 인산일에 맞추어 서울에 상경하였는데, 만세시위를 목격하게 되었다. 그는 자초지종을 파악하기 위해 서울에 있던 제자 정한교(鄭漢敎), 신태연(申泰鍊), 민영순(閔泳純)을 만나 경위를 듣고, 가평군에 만세시위를 알리고자 이들에게 받은 「독립선언서」 1매와 길에서 받은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 각 1매씩을 가지고 가평으로 돌아왔다. 이규봉은 장남 이윤석(李胤錫)과 제자 정흥교(鄭興敎)에게 서울의 상황을 알리고 이를 논의하는데, 두 사람 모두 찬동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튿날 주민들을 초대하였다. 장기영(張基英), 정성교(鄭聖敎), 이만석(李萬錫), 정재명(鄭在明), 이병찬(李炳贊) 등 약 20여명의 주민들에게 이규봉은 만세시위의 계획을 이야기하였고, 이들 대부분이 이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종교계와 긴밀히 협력하는 한편 서당에서 종이를 걷어 태극기와 비밀통문을 제작하였다. 최종화(崔宗和)최용화(崔容和) 두 사람이 이를 담당하였으며, 부녀자들과 함께 비밀리에 태극기 1,800여 개, 비밀통문 500여 매를 제작할 수 있었다. 거사일은 3월 15일로 정해졌는데, 전날인 3월 14일 밤 정기복(鄭基福), 정천수(鄭天洙), 최인화(崔仁和) 3인이 북면의 각 동리에 비밀통문을 전달되었다.

이튿날인 15일 오전9시경 약 50여명의 주민들이 북면의 성황당에 먼저 집결하여 만세를 불렀고, 이어 미리 준비된 수 백명이 북면사무소로 몰려가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만세를 외치며 가평 읍내로 진출하였다. 태극기를 높이 든 체 도착한 북면 주민들은 가평 읍내의 관청과 공공기관에 몰려가 만세를 외쳤으며, 가평 읍내 주민들도 호응하였다. 오후가 되어 만세시위의 무리는 수천에 달했으며, 일본 경찰은 필사적으로 저지하려 하였다. 이날 저녁 일본 경찰은 만세시위를 주도한 인물들을 색출하기 시작하여, 이규봉, 이윤석, 최기선, 최인화, 최종화 등이 체포되었다. 이튿날 장기영, 정성교 등이 북면 주민 200여명과 함께 목동리의 성황당에 모여 구금된 인물들을 구출하러 출동하였다. 당고개에 이르러 출동한 헌병들과 마주쳤고, 헌병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돌을 던지고 멱살을 잡는 등 저항하였으나 결국 체포되었다. 정석조는 체포되었으나 심문과정에서 풀려난 것으로 파악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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