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봉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724
한자 李圭鳳
영어공식명칭 I Gyubong
이칭/별칭 기남(沂南),목천(牧川)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위곡리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성주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3년연표보기 - 이규봉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6년 - 이규봉 이충응 의병진 종사관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04~1905년 - 이규봉 진보회 및 일진회 활동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05년 - 을사조약 체결
활동 시기/일시 1906년 - 이규봉 가릉보성학교 한문교사 역임
수학 시기/일시 1910년 - 이규봉 수원농림학교 교원강습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일 - 3·1운동 전개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5일 - 이규봉 북면 만세운동 주도 및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61년연표보기 - 이규봉 사망
출생지 이규봉 출생지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위곡리 지도보기
활동지 이규봉 활동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지도보기|가평읍지도보기
묘소 이규봉 묘소 - 강원도 춘천시 동면 장학리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북면 만세시위 주도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가평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가계]

이규봉(李圭鳳)[1873~1961]의 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기남(沂南), 호는 목천(牧川)이다. 1873년 가평군 설악면 위곡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이규봉은 1893년 가평읍에서 사숙을 운영하였으며,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斷髮令)을 계기로 의병이 일어나자 의병장 이충응(李忠應)의 종사관으로 활동하였다.

1902년 이준(李儁)과 교유하면서 근대 학문에 심취하여 가평 지역에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4년에는 진보회(進步會)와 일진회(一進會)에 가입하였으나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일진회를 탈퇴하였다. 1906년 가릉보성학교(嘉陵普成學校)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문맹퇴치에 노력하였다.

1910년 수원농림학교에서 교원 강습을 받아 농사 기술의 보급에 앞장섰다. 1914년 양잠업에 종사하면서 서당 운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때에는 대서업을 개업하여 일본인과 악덕 지주에게 토지가 넘어가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1919년에 고종의 인산일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3·1운동을 보고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휴대해 고향으로 돌아와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동생 이규붕(李圭鵬)과 장남 이윤석(李胤錫), 정흥교(鄭興敎)·최종화(崔宗和) 등과 뜻을 모아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인쇄하여 각처에 전달하는 한편 태극기도 제작하였다. 3월 15일 주민들을 동원, 북면사무소까지 진출하여 만세시위를 벌여 인근 주민들의 관심을 고조시켰다. 3월 16일에는 마을 이장을 중심으로 주민들을 동원하였다. 군중은 가평 읍내에 집결하여, 북면사무소 앞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를 부른 후 가평군청으로 향했다. 일본군은 총기를 발포하며 군중을 강제 해산시키고자 하였다. 일본군이 행동대와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자, 이규봉은 춘천으로 피신하여 은둔생활을 하였다.

1924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목동강습소를 개설하였으며, 같은해 8월 화악청년회를 창립하였다. 1925년에는 목동강습소 부설 여자강습소를 설치하였다. 1927년에는 춘천 우두상리(牛頭上里)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후 과수원을 경영하면서 신품종의 개량과 보급운동에 힘썼다.

광복 후 1948년 춘천 지역에 노인친목단체인 구로회(九老會)를 조직하였다.

[묘소]

이규봉의 묘는 춘천시 동면 장학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규봉은 1956년 춘천시에서 지역사회에 대한 공로로 춘천문화협회장상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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