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665
한자 姜基東
영어공식명칭 Gang Gido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가평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조성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4년 3월 5일연표보기 - 강기동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8년 - 강기동, 가평 지역에서 항일 의병 투쟁 계획
몰년 시기/일시 1911년 4월 17일연표보기 - 강기동 사망
활동지 강기동 의병 활동지 - 경기도 가평군 일대
성격 의병장
성별 남성

[정의]

개항기 경기도 가평 지역에서 정미의병으로 활동한 의병장.

[활동 사항]

강기동(姜基東)[1884~1911]은 경기도 장단(長湍) 출신이다. 장단 고랑포(古浪浦)에서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하던 중, 1907년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군인을 비롯하여 뜻있는 의인들이 항일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장단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의병 투쟁을 전개하다 체포 당하거나 사살당했다. 강기동은 장단에서 체포, 투옥된 의병들을 구출해냈다.

그 후 의병장이 되어 경기도 양주와 포천을 중심으로 인근의 의병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활동하였다. 특히 강기동은 강화도에서 봉기하여, 양주·포천·삭령(朔寧)·마전(麻田), 황해도 토산(兎山)·금천(金川)·재령(載寧) 등지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연기우(延基羽)와 연락하며 함께 싸웠다.

1908년 가평 지역에서 의병장 이은찬(李殷瓚)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같은 해 6월 남학서(南鶴瑞)·오수영(吳壽泳)·임명달(任明達)과 함께 병사를 모아 항일 투쟁을 전개할 것을 맹세하였다. 10월 22일 포천으로 이동하여 1910년 2월 일본군과 전투를 치뤘다. 같은 해 3월 6일 강기동이 이용규 등과 함께 영평(永平)으로 이동해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4월 29일 전성서와 함께 양주(楊州)로 이동, 5월 16일에는 양주 노원(盧原)에서 교전하였다. 5월 27일 서울로 잠입을 시도하다가 체포되었으나 탈출하였다. 강기동은 다시 강두필(姜斗弼)과 함께 1백여 명의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강원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일제는 조선 강점 이후 1910년 9월 하순부터 11월 초순까지 40여일간 황해도에 1개 여단(旅團)을 보냈으며, 11월 25일부터 12월 20일까지 임시 파견대 1개 대대와 헌병 경찰대를 파견하여 경상도 일월산(日月山)을 중심으로 안동, 예천, 영춘(永春), 봉화(奉化) 일대에서 의병을 일망타진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일제는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의 애국 계몽 운동가들의 거점을 소탕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애국지사들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만주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강기동 역시 북간도로 이동하던 중 1911년 2월 원산(元山)에서 체포되어 서울 용산에서 총살,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강기동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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