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659
한자 崔鳴吉
영어공식명칭 Choi Myeonggil
이칭/별칭 자겸(子謙),지천(遲川),창랑(滄浪),문충(文忠)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대성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임현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86년연표보기 - 최명길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05년 - 최명길 증광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11년 - 최명길 병조 좌랑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23년 - 최명길 완성부원군으로 책봉
활동 시기/일시 1632년 - 최명길 이조 판서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35년 - 최명길 호조 판서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37년 - 최명길 좌의정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38년 - 최명길 영의정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43년 - 최명길 청나라에 구금
몰년 시기/일시 1647년연표보기 - 최명길 사망
거주|이주지 최명길 은거지 -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대성리 지도보기 원천골
부임|활동지 경기도 - 경기도
묘소|단소 최명길 묘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
성격 문관
성별
본관 전주
대표 관직 영의정

[정의]

경기도 가평 지역에 은거하였던 조선 후기 문신.

[가계]

최명길(崔鳴吉)[1586~1647]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자는 자겸(子謙)이고, 호는 지천(遲川)·창랑(滄浪)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최업(崔嶪), 할아버지는 최수준(崔秀俊), 아버지는 영흥부사 최기남(崔起南)이다. 어머니는 참판 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아버지 최기남과 함께 광해군 때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대성리 원천골에 들어와 살았다.

[활동 사항]

최명길 집안의 가풍은 경학을 강조하는 분위기였다. 8세에 『논어(論語)』를 접하였고, 15~16세에는 정주학(程朱學)의 글들을 독파하였다. 이후 이항복(李恒福) 문하에서 이시백(李時白)·장유(張維)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1605년(선조 38)에 생원시와 증광시 문과에 연이어 급제하였고, 승문원을 거쳐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1611년(광해 3)에는 공조 좌랑과 병조 좌랑을 거쳤다. 1614년(광해 6)에 유생이 사사로이 명사(明使)와 접촉하는 것을 방치하였다는 탄핵을 받아 투옥되고 삭탈관직 당하였다.

이후 벼슬에 나아가지 않다가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녹훈되고,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으로 책봉되었다. 이어 이조의 좌랑·참의·참판 및 대동청 당상에 임명되었으며, 호패청 당상을 맡기도 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후금과 화의를 성사시켰으나, 수도로부터의 피난 종용, 임진강 수비 포기, 화의 주장 등의 이유로 끊임없이 탄핵을 받았다. 또 인조의 친아버지에 대한 대우 문제를 둘러싸고 홍문관의 배척을 받다가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 경기도관찰사 복무 중 가뭄이 들자, 세금 감면과 관련한 조사 보고서를 올리기도 하였다. 1630년(인조 8)에는 군적을 완성하여 가자 받았고, 1632년 이조 판서에 올랐다.

1632년(인조 10) 경 후금은 명나라 공격에 조선이 지원할 것과 후금-조선 국경에 시장을 열어 교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후금과의 국교를 끊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당시 최명길은 맹약이 이미 깨어졌으므로 후금의 뜻에 따르는 것이 좋은 방책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후금의 원한을 사 화를 자초하는 것 또한 두려워하였다. 1635년(인조 13) 초에 이조 판서에서 면직되었고, 몇 달 뒤 호조 판서가 되었다. 1636년(인조 14) 청 태종 홍타이지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공략하자, 최명길은 청나라 진영에 오가며 강화를 논의하였다. 그동안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으나, 산성이 포위당하자 1637년(인조 15) 1월 항복하였다. 항복 문서의 초안을 최명길이 작성하였는데,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은 문서를 찢고 통곡하였다고 한다. 이후 몇 차례 청나라와 문서를 주고받는 데 관여하였고, 결국 1월 말에 인조가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청나라 군대가 물러간 뒤 우의정과 좌의정에 올랐으며, 각종 국정 문제 및 조선-청, 조선-일본 관계를 살피는 등 여러 활약을 하였다. 1638년(인조 16) 영의정에 올랐으며, 조선 국왕이 청나라에 입조하는 건과 조선군이 명나라 정벌에 참가하는 문제를 막으려 노력하였다. 1640년(인조 18) 청나라에 반대하는 신료 명단에 김상헌 등과 함께 올랐으며, 1643년(인조 21) 1월 청나라에 불려가 구금되었다가 11월 석방되었다. 1645년(인조 23)에 귀국하였고, 2년 뒤인 1647년(인조 25)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최명길의 저서로는 『지천집(藥泉集)』 19권과 『지천주차(遲川奏箚)』 2책 등이 있다.

[묘소]

최명길의 묘는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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