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601
한자 李萬謙
영어공식명칭 Lee Mangyeom
이칭/별칭 자익(子益),하산(霞山)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삼회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근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40년연표보기 - 이만겸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57년 - 이만겸 생원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83년 - 이만겸 증광시 급제
몰년 시기/일시 1684년연표보기 - 이만겸 사망
묘소|단소 이만겸 묘 -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삼회리 지도보기
성격 문관
성별
본관 전의
대표 관직 종부시 직장

[정의]

경기도 가평군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가계]

이만겸(李萬謙)[1640~1684]의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자는 자익(子益)이고, 호는 하산(霞山)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참의(參議) 이수준(李壽俊), 할아버지는 이학기(李學基), 아버지는 사헌부 지평 이행도(李行道)이다. 어머니는 광주 안씨(廣州 安氏)로,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지낸 안헌징(安獻徵)의 딸이다. 첫째 부인은 전주 이씨(全州 李氏) 이유정(李有湞)의 딸이고, 둘째 부인은 문화 류씨(文化 柳氏) 류진창(柳震昌)의 딸이다. 형제로는 동생 이백겸(李百謙)이 있다.

[활동 사항]

이만겸은 1657년(효종 8) 식년시로 치뤄진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1675년(숙종 1)에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석방을 요구하며 여러 차례 연명으로 상소를 올리고, 송시열 문하생들과 함께 대궐 뜰 앞에 엎드려 구원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1683년(숙종 9)에는 절일제(節日製)[조선시대 절일(節日)에 성균관에서 거재 유생(居齋 儒生)과 지방의 유생에게 보이던 시험]에서 직부전시(直赴殿試)[과거의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의 특전을 받아 증광시 갑과 2위로 급제하였다. 관례대로 종부시(宗簿寺) 직장(直長)을 제수받아 한림원에 들어갔으나, 1684년(숙종 10) 사망하였다. 문장으로 유명하였는데, 대구(對句)로 이루어진 변려문(騈儷文)이 뛰어났다고 한다.

[묘소]

이만겸의 묘는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삼회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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