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597
한자 李端相
영어공식명칭 Lee Dansang
이칭/별칭 유능(幼能),정관재(靜觀齋),서호(西湖),문정(文貞)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가평군 상면 태봉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장현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28년연표보기 - 이단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49년 - 이단상 정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59년 - 이단상 호남 암행어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61년 - 이단상 청풍부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65년 - 이단상 양주 동강으로 이거
활동 시기/일시 1666년 - 이단상 양주 영지동에 정관재 지음
활동 시기/일시 1669년 - 이단상 부제학 제수
몰년 시기/일시 1669년 4월 19일연표보기 - 이단상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80년 - 이단상 이조 판서에 추증
추모 시기/일시 1698년 - 이단상 석실서원에 배향
추모 시기/일시 1699년 - 이단상 학산서원에 배향
부임|활동지 청풍도호부 - 충청북도 제천시
부임|활동지 인천도호부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묘소|단소 이단상 묘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부평리
사당|배향지 석실서원 -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사당|배향지 학산서원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
성격 문관
성별
본관 연안
대표 관직 부제학

[정의]

경기도 가평군에 묘가 있었던 조선 후기 문신.

[가계]

이단상(李端相)[1628~1669]의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자는 유능(幼能)이고, 호는 정관재(靜觀齋)·서호(西湖)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현령 이계(李界), 할아버지는 좌의정 이정구(李廷龜), 아버지는 대제학 이명한(李明漢)이다. 어머니는 나주 박씨(羅州 朴氏)로,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의 딸이다. 1628년(인조 6) 아버지의 임지인 남양부(南陽府)의 아사(衙舍)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전의 이씨(全義 李氏)이며, 우의정 이행원(李行遠)의 딸이다. 자식으로 이희조(李喜朝)·이하조(李賀朝) 두 아들과 4명의 딸을 두었다. 딸들은 각각 이행(李涬)·민진후(閔鎭厚)·송징오(宋徵五)·김창협(金昌協)과 결혼하였다. 이단상 본가는 물론 처가와 사돈가가 대체로 병자호란 당시 척화를 주장하였던 가문들로, 경기도의 전통적인 서인 가문을 이루었다. 할아버지 이정구와 아버지 이명한의 묘가 경기도 가평군 상면에 있는 것으로 보아 할아버지 대에 가평으로 이거한 듯하다.

[활동 사항]

이단상은 1648년(인조 26) 진사시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다. 1649년(인조 27)에는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에 서용되었다. 이어 승정원 가주서, 세자시강원 설서, 예문관 검열 등을 역임하였으며,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었다. 서연(書筵)에 나아가 경연의 검토관·시독관·시강관을 지낼 정도로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 외에 사간원 헌납, 사헌부 집의, 병조 정랑, 이조 좌랑 등도 지냈으며,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1655년(효종 6)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유능한 젊은 관료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 하였다.

1659년(효종 10)에는 호남 암행어사가 되어 전라도 지방을 두루 살폈고, 기근이 심한 고을을 구제하게 하였다. 효종이 죽은 뒤 정국이 변하자 한동안 두문불출하며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1661년(현종 2)에 청풍부사(淸風府使)로 부임하였다. 재임 중 폐정 제거에 힘썼으며, 고을의 유생을 모아 학문을 권장하였다. 그러자 청풍부의 백성들이 공덕을 기려 송덕비를 세워주었다. 이후 응교, 집의, 인천부사(仁川府使) 등을 지내다 1664년(현종 5) 입지권학(立志勸學)에 관한 다섯 조목을 상소하고 스스로 관직을 떠났다.

1665년(현종 6) 양주(楊州)의 동강(東岡)으로 이거 하였고, 1666년(현종 7)에는 영지동(靈芝洞)에 서재를 짓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영지동은 동강에서 몇 리 정도 떨어진 곳으로, 숲과 골짜기가 있고 계곡물이 흐르는 곳이었다. 이단상은 계곡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고, 연못 위에 서재를 지어 ‘정관재(靜觀齋)’라 하였다. 또 영지동에서 조금 떨어진 일우명(一牛鳴)에 경치가 좋은 곳을 골라 태극정(太極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인근 유생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영지동의 경관에 반한 송시열(宋時烈)이 「영지동팔영(靈芝洞八詠)」이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후 세자시강원 보덕, 홍문관 응교, 동부승지, 병조 참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거나 사양하였다. 1669년(현종 10)에도 부제학으로 서연관을 겸하다가 곧 물러났다. 병이 깊어져 서울 성동(城東)의 옛집에서 1669년 4월 19일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단상은 학문에 뛰어났으며, 특히 예학에 밝았다. 이단상의 문하에서 아들인 이희조와 사위 김창협, 김창흡(金昌翕), 임영(林泳) 등의 학자가 배출되었다. 이단상의 저술로 『정관재집(靜觀齋集)』, 『정관재별집(靜觀齋別集)』 등이 전한다. 『대학집람(大學集覽)』, 『염락정음(濂洛正音)』, 『성현통기(聖賢通紀)』, 『사례비요(四禮備要)』 등도 저술하였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묘소]

이단상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부평리에 있다. 원래 경기도 가평군 상면 태봉리에 있었으나, 1702년(숙종 28)에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이단상은 1680년(숙종 6) 이조 참판 겸 동지경연, 성균관사, 의금부·춘추관·홍문관·예문관 제학에 추증되고, 다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1684년에는 청백리(淸白吏)에 천거되었다. 1698년 경기도 유생들의 상소로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에 있던 석실서원(石室書院)에 배향되었다. 1699년에는 인천 유생들의 건의로 이단상이 인천부사 재직 중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세웠던 서당에 학산서원(鶴山書院)을 건립하여 제향하였다. 두 서원 모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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