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596
한자 李根弼
영어공식명칭 Lee Keunpil
이칭/별칭 여해(汝諧),효문(孝文)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김근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16년연표보기 - 이근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52년 - 이근필 정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866년 - 이근필 이조 참의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72년 - 이근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옴
활동 시기/일시 1873년 - 이근필 진하겸사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옴
활동 시기/일시 1874년 - 이근필 사헌부 대사헌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76년 - 이근필 예조 판서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76년 - 이근필 황해도관찰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77년 - 이근필 경상도관찰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81년 - 이근필 이조 판서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81년 - 이근필 이용사 당상경리사 제수
몰년 시기/일시 1882년연표보기 - 이근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91년 - 이근필 '효문'이라는 시호 받음
부임|활동지 황해도 - 황해도
부임|활동지 경상도 - 경상도
묘소|단소 이근필 묘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지도보기
성격 문관
성별
본관 전의
대표 관직 예조 판서

[정의]

경기도 가평군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개항기 문신.

[가계]

이근필(李根弼)[1816~1882]의 본관은 전의(全義)이고, 자는 여해(汝諧)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영배(李永培), 할아버지는 이조 참판 이문회(李文會), 아버지는 성균관 대사성 이현서(李玄緖)이다. 어머니는 창녕 조씨(昌寧 曺氏) 조윤수(曺允遂)의 딸이며, 부인은 풍산 홍씨(豊山 洪氏) 홍석모(洪錫謨)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근필은 1852년(철종 3)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55년(철종 5) 승정원 주서에 천거되었고, 1866년(고종 3) 이조 참의가 되었다. 1872년(고종 9)에는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873년(고종 10)에는 진하겸사은정사(進賀兼謝恩正使)로 다시 중국에 다녀왔다. 돌아온 뒤에 중국에 있던 일본인이 모두 양이(洋夷)와 같은 옷을 입고 있다고 보고하여 일본에 대한 지식이 없던 국왕과 관료들을 놀라게 하였다.

1874년(고종 11)에 사헌부 대사헌으로 임명되었고, 1875년(고종 12)에는 한성부 판윤·우참찬을 지냈다. 1876년(고종 13)에는 예조 판서를 거쳐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877년(고종 14) 전국에 흉년이 들었는데, 황해도 지방에서 곡물 유통을 막아 다른 지방의 상황을 더 어렵게 한 죄로 탄핵받아 파면되었다.

이후 다시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경상도관찰사로 재직하며 지방 재정 및 변경 외교 문제 등 실무 현안을 처리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환곡과 군포의 누적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영일현(迎日縣)[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연일읍]에서 양전(量田)을 시행하였고, 조창선(漕倉船)을 개조하였다. 또 일본인의 절영도(絶影島) 거주를 방치한 죄를 물어 동래부사 윤치화(尹致和)와 다대첨사(多大僉使) 한우섭(韓友燮)을 파면하였다. 이외에 일본인과의 밀무역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각종 재해에도 적극 대처하였다. 치적을 인정받아 임기가 연장되었고, 이후에도 이양선과 일본인의 출물 현황 등에 대한 자세한 보고를 조정에 올렸다.

1881년(고종 18)에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사헌부 대사헌, 한성부 판윤, 이조 판서, 홍문관 제학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881년(고종 18) 통리기무아문을 12사(司)에서 7사로 개편할 때 이용사(理用司)의 당상경리사(堂上經理事)에 임명되었다. 1882년(고종 19) 예문관 제학·대사헌을 지내다 사망하였다. 1891년(고종 28) ‘효문(孝文)’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묘소]

이근필의 묘는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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