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566
한자 南廷哲
영어공식명칭 Nam Jeongcheol
이칭/별칭 치상(穉祥),하산(霞山)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방일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현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40년 4월 27일연표보기 - 남정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65년 - 남정철 사마시 합격
활동 시기/일시 1882년 - 남정철 증광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884년 - 남정철 톈진주차독리통상사무로 청나라에 파견
활동 시기/일시 1884년 - 남정철 청나라에 개화당 축출을 위한 출병 요청
활동 시기/일시 1885년 - 남정철 평안도관찰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93년 4월 - 남정철, 일본 변리공사 오이시와 방곡령 사건으로 인한 배상 문제 협의
활동 시기/일시 1893년 8월 - 남정철, 오스트리아의 전권 위원 벡커와 조오수호통상조약 체결
활동 시기/일시 1897년 1월 - 남정철 내부 대신 제수
활동 시기/일시 1909년 - 남정철 기로소 입소
활동 시기/일시 1909년 12월 - 남정철 국민대연설회 발기인으로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0년 6월 - 남정철 평화협회 회장으로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10년 10월 - 남정철 남작 제수
활동 시기/일시 1911년 1월 - 남정철 은사 공채 수령
활동 시기/일시 1912년 8월 - 남정철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음
몰년 시기/일시 1916년 6월 30일연표보기 - 남정철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9년 - 남정철의 친일 행적이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됨
출생지 남정철 출생지 - 서울특별시
거주|이주지 남정철 거주지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방일리 지도보기
부임|활동지 평안도 - 평안도
성격 문관
성별
본관 의령
대표 관직 내부 대신|궁내부 특진관

[정의]

경기도 가평 지역 출신 조선 후기~일제 강점기 문신.

[가계]

남정철(南廷哲)[1840~1916]의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자는 치상(穉祥)이고, 호는 하산(霞山)이다. 할아버지는 남준기(南駿冀), 아버지는 남홍중(南弘重)이다. 1840년(헌종 6) 4월 27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청년 시절에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방일리에 거주하였다.

[활동 사항]

남정철은 1857년(철종 8) 유신환(兪莘煥)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1865년(고종 2)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877년(고종 14)에 건릉참봉(健陵參奉), 세자익위사 익위 등에 임명되었다. 1882년(고종 19)에는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로 임용되었다. 1883년(고종 20) 예조 참의, 동부승지 등을 거쳐 중국 톈진[天津] 주재 참찬관을 지냈다. 1884년(고종 21)에는 톈진주차독리통상사무(天津駐箚督理通商事務)와 이조 참판을 거친 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김윤식(金允植)과 함께 청나라에 가서 개화당의 축출을 위한 출병을 요청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뒤 호조 참판에 기용되었고, 동지부사로 청나라를 방문하여 한로수호통상조약(韓露修好通商條約) 비준 사건의 양해를 구하는 고종의 친서를 이홍장(李鴻章)에게 전달하고 동의를 얻었다.

1885년(고종 22)에는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다시 톈진주차독리통상사무로서 임지에 다녀왔다. 1885년 7월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였는데, 치적을 평가받아 임기가 1년 연장되었다. 평양에 머무는 동안 ‘삼희재(三希齋)’란 서당을 짓고 후진 교육에 힘썼으며, 광산 개발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인 전보국 기술자들에게 매달 일정액의 금전을 주면서 조선 청년들이 전신 기술을 배우게 하였다. 이후 승정원 도승지,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1890년(고종 27)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 형조 판서, 예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93년(고종 30) 4월에는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에 임명되어 일본 변리공사(辨理公使) 오이시[大石正己]와 함경도·황해도에서의 방곡령 사건으로 인한 배상 문제를 협의하고 마무리지었다. 이어 1893년 8월 오스트리아 전권 위원 벡커(Becker)와 조오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1896년(건양 1) 경성부관찰사, 함경북도관찰사, 의정부 찬정을 거쳐 1897년(광무 1) 1월 내부 대신이 되었다. 6월 사례국(史禮局)의 설치를 건의하고 위원이 되어 편집 사무를 담당하였으며, 이어 홍문관 학사를 겸임하였다.

1898년(광무 2)부터 1907년(융희 1) 초까지 궁내부 특진관, 장례원 경(卿), 홍문관 학사 등의 관직을 중복 역임하였다. 1909년(융희 3) 기로소에 들어갔다. 1909년 12월 국민대연설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10년(융희 4) 6월에는 평화협회 회장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일제에 병합된 이후인 1910년 10월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1년 1월에는 2만 5000원의 은사 공채를 수령하였다. 1912년 8월에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6년 6월 30일 사망하였다. 남정철의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었다.

[학문과 저술]

남정철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아들 이찬(李瓚)과 자주 왕래하며 학문을 토론하였고,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와도 교유하였다. 시문과 글씨에도 능하여 덕수궁 정문 대한문(大漢門)의 글씨를 썼다. 이 밖에 남정철의 글씨로 「여흥부대부인지문(驪興府大夫人誌文)」, 「제각상량문(祭閣上樑文)」, 「태백산선사양각중수상량문(太白山璿史兩閣重修上樑文)」 등이 있다. 문집으로는 『하산고(霞山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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