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557
한자 金昌翕
영어공식명칭 Kim Changheup
이칭/별칭 자익(子益),삼연(三淵)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성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53년연표보기 - 김창흡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73년 - 김창흡 진사시 합격
몰년 시기/일시 1722년연표보기 - 김창흡 사망
거주|이주지 영평현 - 경기도 포천군
사당|배향지 경현단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산70 지도보기
성격 학자
성별
본관 안동
대표 관직|경력 증 이조 판서

[정의]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경현단에 배향된 조선 후기 학자.

[가계]

김창흡(金昌翕)[1653~1722]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자는 자익(子益)이고, 호는 삼연(三淵)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좌의정 김상헌(金尙憲), 아버지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다. 어머니는 해주목사 나성두(羅星斗)의 딸인 안정 나씨(安定 羅氏)이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과 예조 판서·지돈령부사 등을 지낸 김창협(金昌協)이 형이다.

[활동 사항]

김창흡은 1673년(현종 14)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하지만 이후로 과거에 나가지 않았고, 산수를 유람하였다. 1674년(현종 15)과 1675년(숙종 1)에 평양, 한계령, 월출산 등을 유람하며 시를 지었고, 1676년(숙종 2)에는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독서하며 지냈다. 1679년(숙종 5)에는 철원에 있는 삼부연(三釜淵)에 갔다가 절경에 매료되어 터를 잡고 살며 ‘삼연’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아버지가 진도로 유배를 떠나자 유배지까지 배웅하였다. 이후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사망하자 영평(永平)[지금의 경기도 포천군]에 은거하였다. 신임사화로 절도(絕島)에 유배된 형 김창집(金昌集)이 1722년(경종 2) 사사(賜死)되자 지병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창흡은 『장자』와 『사기』를 좋아하였고, 부모의 상을 당한 뒤에는 슬픔을 잊기 위해 불전(佛典)을 가까이 하였다. 이후 주자의 글에서 깨달음을 얻어 유학에 전념하였다. 형 김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기설(理氣說)에서는 선한 정(情)이 맑은 기(氣)에서 나온다고 말한 이이의 주장에 반대하고 선한 정이 오직 성선(性善)에서 나온다는 김창협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반면 사단칠정(四端七情) 문제에서는 이이의 주장을 따랐다. 인품(人品)을 성인(聖人)·대현(大賢)·군자(君子)·선인(善人)·속인(俗人)·소인(小人) 6등으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저서로 『삼연집(三淵集)』, 『심양일기(瀋陽日記)』, 『문취(文趣)』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김창흡은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1792년(정조 16)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장석마을에 있던 미원서원[지금의 경현단]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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