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553
한자 金堉
영어공식명칭 Kim Yuk
이칭/별칭 백후(伯厚),잠곡(潛谷),회정당(晦靜堂),문정(文貞)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청평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성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80년연표보기 - 김육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05년 - 김육 사마시 합격
활동 시기/일시 1624년 - 김육 증광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33년 - 김육 안변도호부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38년 - 김육 충청도관찰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49년 - 김육 우의정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51년 - 김육 영의정 제수
몰년 시기/일시 1658년연표보기 - 김육 사망
거주|이주지 가평군 잠곡 청덕동 -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지도보기
부임|활동지 음성현 - 충청북도 음성군
부임|활동지 안변도호부 - 강원도 안변군
부임|활동지 충청도 - 충청도
묘소|단소 김육 묘 -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
사당|배향지 경현단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산70 지도보기
성격 문관
성별
본관 청풍
대표 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후기 경기도 가평 지역에 은거한 문신.

[가계]

김육(金堉)[1580~1658]의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자는 백후(伯厚)이고, 호는 잠곡(潛谷)·회정당(晦靜堂)이다.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인 김식(金湜)의 4대손이다. 할아버지는 군자감 판관 김비(金棐), 아버지는 참봉 김흥우(金興宇)이다. 어머니는 현감 조희맹(趙希孟)의 딸이다.

[활동 사항]

김육은 1605년(선조 38)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다. 1609년(광해군 1) 태학생들과 함께 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무오사화와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을 문묘(文廟)에 배향할 것을 건의하는 소]를 올렸다가 문과 응시 자격을 박탈당하고 가평 잠곡 청덕동에 은거하였다. 이때 화개산(華蓋山) 남쪽에 회정당(晦靜堂)을 짓고 학문을 닦으며 ‘잠곡’이라고 자호하였다. 『황극내편(皇極內篇)』의 범수(範數)에 의거하여 점을 친 결과 일지삼(一之三)의 수(守)라는 수(數)를 얻었는데, 그 점사(占辭)에 “군자는 그렇기 때문에 숨어 살면서 조용히 기다린다[君子以晦處靜俟]”고 하여 그 말에 따라 집의 이름을 ‘회정’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었다. 1624년(인조 2)에는 음성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증광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정언에 제수되었다. 1633년(인조 11) 9월에는 안변도호부사로 부임하여 청나라의 침입을 대비하였고, 1636년(인조 14)에는 성절사(聖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38년(인조 16) 6월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여 대동법 시행을 건의하였고, 수차(水車)를 만들어 보급하였다. 또 『구황촬요』·『벽온방(辟瘟方)』 등을 편찬·간행하였다. 이후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면서 화폐 주조·유통, 수레 제조·보급 및 시헌력(時憲曆) 제정·시행 등에 힘썼다.

1649년(효종 즉위년) 효종이 즉위한 후 대사헌이 되었다. 1649년(효종 즉위년) 9월 우의정에 오르면서 대동법의 확장 시행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대동법 실시에 반대하는 김집(金集)과 불화를 겪다 1650년(효종 1) 1월 중추부 영사로 물러나기도 하였다. 이후 1651년(효종 2)과 1654년(효종 5) 두 차례 영의정에 오르며 충청도에서의 대동법 시행에 성공하였고, 민간에서의 주전(鑄錢)도 성과를 거두었다. 1654년(효종 5) 6월에는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을 구상하였고, 1657년(효종 8) 효종에게 전라도에서의 대동법 시행을 건의하였다. 논의가 진행되던 도중 1658년(효종 9)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육의 저술로는 『유원총보(類苑叢寶)』, 『황명기략(皇明紀略)』, 『종덕신편(種德新編)』, 『송도지(松都誌)』,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천성일록(天聖日錄)』, 『청풍세고(淸風世稿)』, 『조천일기(朝天日記)』, 『기묘록(己卯錄)』, 『잠곡필담(潛谷筆談)』, 『당삼대가시집(唐三大家詩集)』, 『잠곡유고』, 『잠곡별고』, 『잠곡유고보유(潛谷遺稿補遺)』, 『잠곡속고(潛谷續稿)』 등이 있다. 이 중 『유원총보』는 최초의 백과사전류로 주목된다.

[묘소]

김육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육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장석마을에 있던 미원서원[지금의 경현단], 충청북도 제천시에 있던 봉강서원(鳳岡書院), 평양시 강동군에 있던 청계서원(淸溪書院), 개성시에 있는 숭양서원(崧陽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또 1705년(숙종 31)에는 김육을 추모하기 위해 지금의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청평리 잠곡동잠곡서원(潛谷書院)이 건립되었다. 숭양서원을 제외한 나머지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폐철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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