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547
한자 姜永天
영어공식명칭 Gang Yeongcheon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적목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성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추모 시기/일시 1700년 3월 15일 - 숙종, 강영천 효자 정문 하사
출생지 강영천 출생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적목리 논남마을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강영천 거주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적목리 논남마을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강영천 효자문 -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적목리 논남마을 지도보기
성격 효자
성별
본관 진주

[정의]

조선 후기 경기도 가평 지역 출신 효자.

[가계]

강영천(姜永天)의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활동 사항]

강영천은 조선 숙종 때 인물로, 지금의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적목리 논남마을에 살며 효행으로 이름을 알렸다. 강영천은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연일 정씨(延日 鄭氏)와 함께 살았다. 7세 때 어머니가 병으로 눕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잠시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간호를 하였다. 또한 어머니가 병이 악화되어 정신을 잃게 되자, 강영천은 손가락을 문지방에 찧어 피를 내서 어머니 입에 흘려 넣고는 쓰러졌다. 어머니가 깨어나 피를 흘리며 쓰러진 아들을 발견하여 정성껏 간호한 끝에 깨어날 수 있었다.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 간질병 환자였던 홀어머니를 모셨는데, 어느 날 서당에 다녀오던 중 간질병에 사람 피가 약이 된다는 말을 들었다. 집에 돌아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어머니를 발견하고는 손가락을 창문틀에 끼어 피를 내어 어머니 입에 흘려드림으로써 병을 낫게 하였다고 한다. 『여지도서』에는 “어머니가 죽을 지경에 이르러 손가락을 잘라 그 목숨을 구해 이후 21년 동안 모시고 살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강영천이 30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가 다시 병으로 눕게 되었는데, 강영천은 약을 구하기 위해 포천으로 떠났다. 강영천이 떠난 후 강영천의 부인이 집에서 홀로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는데, 시어머니가 옆구리를 부여 잡고 신음을 내뱉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치마를 풀어 헤쳐보니 시어머니의 옆구리에 큰 상처가 나서 고름과 구더기가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부인은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어 시어머니의 병을 구하였다고 한다.

강영천은 천생효자(天生孝子)라고 칭송되었고, 사림에서 포상을 청하여 효자 정문이 내려졌다. 또한 강영천 부부의 효성이 마을에 귀감이 되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매년 하루를 잡아 효성을 기렸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1700년(숙종 26) 3월 15일 효자 정문이 내려졌다. 또 강영천의 집 근처에 있는 높이 830m의 산이 강씨봉(姜氏峰)으로 이름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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