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391
한자 古代
영어공식명칭 Ancient Time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가평군
시대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고대/삼국 시대/고구려,고대/삼국 시대/백제,고대/삼국 시대/신라,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강문석

[정의]

삼한 시대부터 통일 신라 시대까지 경기도 가평 지역의 역사.

[삼한 시대]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될 무렵, 서북한 지역의 주민들이 남쪽으로 많이 이동하였다. 이러한 대규모 주민 이동은 한반도 남부 사회에 적지 않은 사회적, 문화적 변동을 야기하였다. 가평 지역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유적들이 확인되고 있는데, 가평군 가평읍 달전리 유적, 가평천 유역의 마장리 주거지·이곡리 주거지, 조종천 유역의 덕현리 유적, 북한강 변의 청평리 유적·대성리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2003년에 조사된 달전리 유적의 경우, 움무덤에서 화분형 토기와 배부른 단지가 세트로 부장된 것이 확인되었는데, 대동강 유역 고조선인들의 부장법과 같아 주목을 받았다. 달전리 유적에서는 또한 낙랑군의 중심지인 평양에서 출토되는 것과 같은 형식의 철제 단검도 출토되었다. 낙랑군 출토 단검과 같은 양식의 단검은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 경산시에서도 출토된 적이 있다. 가평 지역이 평양과 경산을 잇는 교통로 상에 자리 잡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삼국지』「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삼한 지역에 많은 수의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가평 지역에 비정할 수 있는 국가는 확인되지 않았다. 북한강 변과 가평천, 조종천 일대의 평야를 중심으로 많은 마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국가를 형성할 만큼의 세력으로 성장하지는 못한 듯하다.

[삼국 시대]

고구려·백제·신라 삼국 중 가평 지역을 가장 먼저 지배한 국가는 백제이다. 백제의 가평 지역 지배와 관련하여, 2010년 예맥문화재연구원이 발굴 조사한 강원도 화천군 하남면 원천리 42-1번지 일대 유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천리 유적은 강변 충적 대지에 위치한 1만 7,500㎡ 규모의 대규모 유적으로, 청동기 시대부터 한성 백제 시기에 이르는 유적과 유물이 발굴되었다. 특히 북한강 상류 지역에서 최초로 확인된 대규모 한성 백제 마을 유적이어서 주목된다. 백제 유적의 연대는 서기 2~4세기이며, 중심 연대는 3세기이다. 가평군보다 더욱 북한강 상류에 위치한 지역에서 대규모 한성 백제 시기 유적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가평 지역 역시 3세기 무렵부터 한성 백제의 권역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고구려는 가평 지역에 근평군(斤平郡)과 심천현(深川縣)을 설치하였다. 근평군과 심천현의 정확한 설치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대략 5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가평 지역이 고구려 영역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광개토왕은 396년(광개토왕 6)에 백제에 대한 대규모 정벌에 나서 58성 700촌을 빼앗았다. 그리고 400년(광개토왕 10)에는 5만 명의 군대를 보내 신라를 침입한 왜를 격퇴하고 임나가라를 정벌하였다. 이때 광개토왕의 군대는 한강을 따라 남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충주 고구려비는 광개토왕·장수왕을 전후한 시기에 고구려가 충주 지역을 점령하였음을 보여준다. 북한강 인근에 있는 가평 지역 역시 광개토왕과 장수왕을 전후한 시기에 고구려가 점령하고 직접 통치하였을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고고학적으로는 고구려 산성의 특징인 물림 쌓기 방식으로 성벽을 축조한 가평의 현리산성을 주목할 수 있다. 고구려가 가평 지역 통치를 위해 새로 쌓았거나 수리한 성으로 보인다.

신라는 551년(진흥왕 12) 무렵 고구려로부터 가평 지역을 빼앗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551년에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침공해 한강 유역을 빼앗았다. 이때 거칠부(居柒夫) 등이 이끄는 신라군은 한강 상류의 죽령 이북 고현 이내 10군을 차지하였다. 한강 상류에 위치한 가평 역시 10군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 지리지 삭주(朔州) 조에 의하면, 637년(선덕여왕 6)에 우수주(牛首州)[지금의 강원도 춘천시]에 군주(軍主)를 두고 정(停), 즉 군단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우수주는 한강 상류 지역의 중요 군사 기지를 관할하였으므로, 가평 지역 역시 우수주 군주의 군사적 통제를 받았을 것이다. 또한 당시 군주는 행정에도 관여하였기 때문에 가평 지역은 행정적으로도 우수주 군주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춘천과 가평의 이러한 관계는 조선 초기인 1413년(태종 13)에 가평 지역이 경기좌도에 이속될 때까지 이어졌다.

[남북국 시대]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데 이어, 676년 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 밖으로 완전히 몰아내면서 삼국 통일이 완성되었다. 삼국 통일 후 신라는 지방을 9주 5소경으로 편제하였는데, 가평 지역은 9주 중 삭주에 속하였다. 고구려가 가평 지역을 지배하던 시기에 사용한 ‘근평군’과 ‘심천현’이라는 명칭은 통일 이후까지 그대로 사용되다가 경덕왕[재위: 742~765] 때 가평군(嘉平郡)과 준수현(浚水縣)으로 변경되었다. 경덕왕은 한화 정책을 실시하여 관직명과 군현의 명칭을 중국식으로 바꾸었는데, 가평군과 준수현으로의 명칭 변경도 한화 정책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통일 신라 시대에 군에는 태수, 현에는 현령이나 소수가 파견되었는데, 학문적 능력이 있는 육두품 출신들이 많이 임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방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전쟁 대비 능력이었던 통일 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통일 신라 시대 가평 지역 주민의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는 없으나, 「신라촌락문서」를 근거로 어느 정도 추측해 볼 수는 있다. 「신라촌락문서」는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근처 4개 자연촌에 대한 세금 징수와 관련된 문서이다. 문서는 3년마다 작성되었으며, 촌마다 호수, 인구수, 우마수, 토지 면적, 뽕나무, 잣나무, 호두나무 등의 숫자와 변동 사항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집단으로 묶은 것이 확인되는데, 8명에서 10명, 15명 정도를 한 집단으로 묶었다. 이 집단은 사람의 수나 재산에 따라 등급을 나누었는데, 최하 등급이 많아서 가난한 생활상을 보여준다. 또한 마을 사람을 남녀별, 그리고 나이별로 정남과 정녀, 조자와 조녀자, 추자와 추녀자, 소자와 소녀자, 제공과 제모, 노공과 노모의 6등급으로 구분하였다. 성별과 연령별로 사람을 나눈 것은 역역 동원할 때 참고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마을의 우두머리인 촌주는 마을 사람들의 정보와 촌의 실상을 중앙 정부에 제공하고, 역역 징발과 조세 수취 등의 자잘한 일을 담당하였다.

한편, 신라는 통일 후 722년(성덕왕 21년) 백성들에게 정전을 지급하였다. 정전은 국가가 농민들에게 땅을 나누어 준 것이 아니라 농민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땅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해준 것이다. 「신라촌락문서」에는 ‘연수유전답(烟受有田畓)’이라는 토지 이름이 보인다. 연수유전답도 정전과 마찬가지로 마을 사람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땅에 대해 국가가 소유권을 인정해준 것으로 생각된다. 마을 사람들은 이외에 관청에 소유권이 있는 토지에 의무적으로 경작을 해야 하였다. 가평 지역 사람들도 조세 수취와 역역 동원 등에 있어 「신라촌락문서」에 나오는 사람들과 비슷한 처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가평 지역 산에 대한 제사 관련 『삼국사기』 잡지 제사 조에 의하면 근평군 화악(花岳)에서 소사(小祀)를 지냈다고 하는데, 화악은 화악산[1,468.3m]을 말한다. 가평군 북면에 있는 광주산맥의 한 줄기로, 가평군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한편, 신라의 제사 체계 정비는 김춘추가 중국 문물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문무왕을 거쳐 신문왕 대에 이르는 시기에 왕권 강화와 함께 지방 제도가 새롭게 정비되는데, 제사 체계 역시 이때 함께 완성되었다. 당시 당(唐)이나 일본은 모든 국가 제사를 중요도에 따라 대사·중사·소사로 구분하였는데, 신라는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대한 제사만 대사·중사·소사로 구분하였다. 대사·중사·소사의 대상은 전국에 흩어져 있었고, 그에 따라 관할 지역의 관청이 주관하여 지역의 수호신을 제사하였다. 명산대천 중 소사의 대상이 되는 산의 경우는 대부분 해당 지역의 진산이었기 때문에 소사는 지역의 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가졌다.

삼국 통일 후 신라 조정은 그전까지 자체적으로 실시되던 지역 산에 대한 제사를 국가가 거행함으로써 지역민에 대한 지배를 강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가평 지역에서 행해진 화악산에 대한 제사도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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