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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1638
한자 佛家傳統 雲岳山懸燈寺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현등사길 34[운악리 산163]
시대 신라/통일신라/고려/조선
집필자 이현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540년 - 인도 승려 마라가미 창건
특기 사항 시기/일시 898년 - 도선국사 중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210년 - 보조국사 지눌 중창, 현등사 명칭의 시작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11년 - 함허대사 중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06년 - 왕이 사신을 보내어 원당에서 제사를 지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46년 - 극락보전 조성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59년 - 아미타삼존불상 조성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70년 - 신중도 제작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11년 - 현등사 중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23년 - 화재로 대부분 전각 소실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24년 - 극락보전, 누각, 요사 등 80여 칸을 중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25년 - 삼보방 중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26년 - 위실각 조성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32년 - 『운악산현등사사적』 저술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48년 - 화담의 부도 조성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61년 - 칠성도 제작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73년 - 왕이 사신을 보내어 원당에서 제사를 지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1년 - 상궁 하씨가 화주가 되어 중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3년 - 호운, 우화가 석축 보수하고 『현등사석축중수기』 지음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6년 - 현등사 중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8년 - 김기환이 『현등산중수기』를 지음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5년 - 해은이 본사 봉선사가 설립한 광동학원에 절의 산림을 기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0년 - 6·25전쟁으로 인해 전각 소실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1년 - 현등사 중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4년 9월 26일 - 현등사 삼층석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3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5년 - 현등사 중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3년 9월 19일 - 가평하판리지진탑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7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4년 - 극락전 보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7년 - 삼성각과 지장전을 보수, 보광전 조성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2년 9월 16일 - 현등사 목조아미타좌상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3호, 청동지장보살좌상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4호, 아미타회상도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5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3년 9월 8일 - 현등사 신중도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3호, 지장시왕도가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4호, 칠성탱화도가 경기도 문화재자로 제125호, 독성도가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6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4년 11월 29일 - 수월관음도가 경기도 유형문화재 198호, 함허당득통탑 및 석등이 경기도 유형문화재 199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2년 12월 27일 - 가평 현등사 동종 보물 제1793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4년 5월 9일 - 현등사 지장시왕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73호 지정

[정의]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운악산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봉선사의 말사.

[개설]

현등사는 540년(법흥왕 27) 인도 승려 마라가미가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운악산에 창건한 사찰로,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한 차례 폐사와 세 차례 중창을 거쳤다. 현대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 봉선사의 말사로 이어지고 있다.

[변천과 현황]

현등사(懸燈寺)는 『운악산현등사사적(雲嶽山懸燈寺事蹟)』에 따르면, 540년(법흥왕 27) 인도 승려 마라가미(摩羅訶彌)가 불법을 전하러 왔을 때 왕이 절을 창건해 준 것이 시작이다. 법흥왕이 마라가미를 맞으러 가니, 마라가미는 ‘옛날 구아산 속의 법흥이 기미 해안의 법흥이 되었구나’ 하면서 코끼리를 타고 왔다고 한다. 절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훗날 ‘운악산사(雲嶽山寺)’로 일컬었다. 이후로 한동안 폐사가 되었다가, 898년(효공왕 2) 구산문(九山門)의 동리산문(桐裏山門) 출신 도선(道詵)이 두 번째로 창건하였다. 도선은 고려의 도읍을 개경(開京)으로 정하고 송악산(松嶽山) 아래 기가 허한 세 군데에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동쪽 땅의 기를 보충하고자 정한 곳이 운악산 현등사 자리였다. 『운악산현등사사적』을 보면, ‘신라가 쇠할 때 운악산 절이 불타고 있었다. 도선법사는 당(唐) 일행(一行)의 도술을 들여왔는데, 이미 수도를 송악산 아래 두고 학을 날려 세 군데에 약사불을 모신 절을 세워 기가 허한 곳을 눌렀다. 운악산의 수려함을 보고 절터에 들어가니 관음보살상이 있어서 절하였고, 천불이 있어 염불하였다. 이어서 탑 주변을 걸으며 달과 별을 보니 탑 속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라고 하여 그 내용이 확인된다.

다음 중창은 1210년(희종 6)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이 주도하였다. 지눌은 망일산(望日山) 원통암(圓通菴)에서 운악산을 바라보니 불빛이 있는 곳에 절터와 관음당이 있었고, 불당 앞 석등의 불이 꺼지지 않아 절을 세웠다. 이 때 꺼지지 않는 등불에서 유래되어 ‘현등사(懸燈寺)’라는 명칭이 생겨났다는 설화가 있다. 마지막 중창은 1411년(태종 11) 함허대사(涵虛大師) 기화가 이끌었다. 기화삼각산 원통사(圓通寺)에서 떠나 운악산에 들었을 때 길을 잃었고, 사슴이 인도하여 오래된 전각이 한 채 있는 곳에 다다랐다. 주변에 전각을 지을 만한 나무가 있어 왕실의 원당(願堂)을 그곳에 세우고, 왕으로부터 300결의 토지를 받게 되었다. 원당의 이름은 19세기 초까지 ‘위실각(位室閣)’으로 일컬었고, 세종의 아들 평원대군과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의 위패가 모셔졌다. 조선 전기 현등사와 왕실의 관계는 태백산사고본 『문종실록』 1권에서도 볼 수 있다. 현등사의 승려 설정이 진관사(津寬寺)의 전세를 가져가 의금부에 잡혀간 내용으로, ‘현등사는 세종이 신임하던 신미(信眉)가 머물던 곳이니 설정은 불의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현등사에서 쌀을 운반해 간 것은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알고 있다’라고 나와 있다.

1811년(순조 11)에 이르면 취윤(就允), 원빈(圓彬)이 사찰 전반을 중수하였고, 1823년(순조 23) 3월 27일 발생한 화재는 관음전에 있었던 금동관음보살상과 위실각, 청심당(淸心堂), 양로방(養老房)을 제외하고 전각 대부분을 불태웠다. 1824년 취윤과 원빈이 극락보전(極樂寶殿)과 누각, 요사채 등 여러 전각을 다시 중건하였다. 1825년에도 삼보방(三寶房), 1826년에는 위실각을 지었는데 앞서 일련의 과정을 기록한 것이 『운악산현등사사적』이다. 그 뒤에 1891년(고종 28) 상궁 하씨가 화주가 되어 절을 중수하고, 1893년 호운(浩雲) 및 우화(雨華)가 석축을 보수하였고, 1916년 금명(錦明)이 새로이 중수하였다. 여러 차례 중수한 노력으로 1945년 해은(海隱)이 본사인 봉선사의 재단법인 광동학원에 절의 산림 625정보를 기증할 정도로 사세가 커졌으나, 1950년 한국전쟁에 전각이 다수 소실되었다. 1961년과 1975년 성암(省庵)이 정부 보조금으로 두 차례 중수하였고, 1984년 극락전도 재건하였다. 같은 해 삼성각(三聖閣), 지장전(地藏殿), 보광전(普光殿)에 대한 불사를 모아 1987년 충현이 도량을 완성하였다.

현재 완성된 현등사 가람은 일주문(一柱門)부터 시작된다. 일주문은 다른 사찰과 다르게 한글 종서 현판이 걸렸으며, 정면으로 지대가 높은 곳으로 오르면 불이문(不二門)을 만나 볼 수 있다. 불이문을 통과하여 ‘108계단’을 지나면 왼쪽에 지진탑(地鎭塔)과 오른쪽에 운악산방(雲嶽山房)있다. 한 차례 계단을 더 오르면 삼층석탑을 시작으로 마당이 펼쳐진다. 중앙에 극락전이 있고 시계방향으로 보광전, 요사채, 지장전, 삼성각이 자리한다. 중심 전각인 극락전보다 지대가 높은 곳에 영산보전(靈山寶殿)과 만월보전(滿月寶殿)이 갖춰지고, 가장 높은 곳에 적멸보궁(寂滅寶宮)이 마련되었다. 함허대사의 부도탑과 석등은 현등사 경내에 오르던 등산로 반대편 길에 위치하고, 1893년 호운과 우화가 보수하였다는 석축은 절 입구와 지진탑 근처에서 볼 수 있다. 사적기에 쓰인 대로 현재 가람은 이모저모를 갖추었으며 다수의 지정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관련 문화재]

현등사는 13건 14점의 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보물 제1793호 가평 현등사 동종(加平懸燈寺銅鍾),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3호 현등사 삼층석탑(懸燈寺三層石塔), 제183호 현등사 목조아미타좌상(懸燈寺木造阿彌陀坐像), 제184호 현등사 청동지장보살좌상(懸燈寺靑銅地藏菩薩坐像), 제185호 현등사 아미타회상도(懸燈寺阿彌陀會上圖), 제193호 현등사 신중도(懸燈寺神重圖), 제198호 현등사 수월관음도(懸燈寺水月觀音圖), 제199호 현등사 함허당득통탑 및 석등(懸燈寺涵虛堂得通塔 및 石燈) 등이 이에 해당한다.

보물 제1793호 가평 현등사 동종은 현재 전하는 조선 후기 범종 중에서도 특이한 예에 속한다. 조선 후기 범종이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 활동한 사인(思印)과 같은 주종장(鑄鍾匠)이 만든 것과 달리, 가평 현등사 동종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활동하던 천보(天寶)가 1619년(광해군 11)에 제작하였다. 종의 윗부분 천판(天板)이 둥글고 중앙 배 부분에 있는 세 줄의 선이 있으며, 하대(下帶)에 베풀어진 파도무늬는 전형적인 조선 전기 왕실발원(王室發願)의 종과 비슷하다. 원래 소장처가 왕실 원찰이었던 본사 봉선사였던 것을 미루어 볼 때, 조선 전기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3호 현등사 삼층석탑은 조선 전기 불탑 중 남아 있는 수량이 적은 것 중의 하나이다. 1470년(성종 원년) 세종의 아들 영응대군의 부인과 딸, 사위가 석탑을 중수할 때 사리를 납입하였다는 기록이 사리함과 발견되었고, 1411년(태종 11) 태종의 원찰이었던 사실과 맞물려 원탑(願塔)으로 추정되었다. 표현에서도 탑신부에 보이는 단순한 장식이 조선시대 능묘 조각에서 보이는 것과 비슷하여 왕실과 관련이 엿보인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4호 현등사 청동지장보살좌상은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이 음각되어 있어 제작할 때 바닥면에 소원하는 내용을 담은 내력을 알 수가 있다. 1790년(정조 14) 5월 ‘경기 가평 서령 운악산 현등사 지장암(京畿 加平 西嶺 雲岳山 懸燈寺 地藏庵)’에 모셔지기 위해 만들어졌고, 당시 주로 불화를 그렸던 설훈(雪訓)이 제작한 유일한 예이다. 18세기 후반 전국적으로 사찰에 전각을 새로 짓지 않아 불상을 만드는 경우가 줄어들고, 그림을 그리던 승려가 불상까지 만들게 된 시기성을 드러낸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9호 현등사 함허당득통탑 및 석등은 1411년(태종 11) 현등사를 마지막으로 중창했던 함허대사 기화의 부도탑과 석등이다. 1433년(세종 15) 함허대사가 입적한 후에 만들어졌으며, 이 시기에 불교계가 위축되면서 승탑 건립도 제한이 많았는데 함허대사는 왕실의 예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함허대사의 승탑은 현등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봉암사(鳳巖寺), 정수사(淨水寺), 연봉사(烟峯寺) 등에도 있다. 사리를 나누어 탑을 세운 것으로 각 승탑의 모습은 다르지만, 고려 말기에 분사리하여 탑을 세우는 전통이 조선 초기에도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현등사의 승탑은 앞에 석등이 동반되는 것도 시기를 대표하는 특징으로 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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