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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의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1464
한자 出生儀禮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가평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덕묵

[정의]

경기도 가평 지역의 아이의 출생과 관련하여 행하는 의례.

[개설]

출생의례는 사람이 태어날 때를 전후한 의례이다. 따라서 태어나기 전 기자신앙에서부터 돌잔치에 이르기까지 행해지는 의례로서, 한 사람의 일생을 통해서 보았을 때 일생 의례 중 맨 앞에 해당한다.

[연원 및 변천]

출생의례의 역사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우리나라의 일생 의례에는 민간 신앙, 무속, 유교, 불교, 도교 등 다양한 요소가 드러나고 있어 고대로부터 전승되면서 역사와 함께 다양한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례]

가평의 출생의례에 대한 조사 보고 내용은 1930년대에 가평읍 복장리에서 출산한 이화영 씨에 대한 조사 보고에서부터 시작된다. 1914년생인 이화영 씨는 열일곱 살에 시집을 와서 3년이 넘도록 아이가 없자 정화수를 떠놓고 빌었으며, 친정어머니가 준 출산에 효험이 있다는 물건을 이불 밑에 넣고 자는 등의 행위를 했고, 면화를 재배하여 물레를 돌려 옷감을 만들어 아기의 배내옷과 기저귀를 만들었다. 또한 누에를 키워 아이가 입을 명주옷도 만들었다. 방에 하나에 짚을 깔아 산실을 만들었으며 출산 후 금줄을 치고 삼신상을 차려놓았다. 당시 부유하지 못한 집에서는 백일과 돌잔치를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1960년대까지 큰 변화 없이 이어졌다. 다만 면화를 재배하거나 누에를 키워 직접 옷감을 장만하던 생활상에서 1950년대 이후에는 시장에서 천을 구입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뀌게 된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아이의 출산은 가정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병원 등 집 이외의 의료 시설에서 출산하거나 산파와 같은 전문적인 외부인을 부르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이를 낳을 때의 자세는 누워서 낳는 요즘과 달리 엎드려서 낳는 경우가 더 많았다. 탯줄처리나 금줄을 치는 행위는 남자들이 주로 담당했으며 탯줄을 태운 재는 보관해 두었다가 아이의 입이 헐거나 입병이 났을 때 약으로 쓰기도 했다. 산후 조리도 3일에서 1일주일 정도 쉬는 것이 전부였으며 임산부들은 입덧 과정에서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동안의 가평 지역 출생의례에 대한 조사 보고 내용을 보았을 때 출생의례를 둘러싼 이러한 환경은 큰 변화 없이 1930년대 이후 1960년대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농촌의 생활 환경이 수십년 동안 큰 변화를 겪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집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1970년대까지도 농촌에서 볼 수 있었으나 1980년대 이후에는 대부분 병원을 찾게 된다. 1980년대에는 병원에서 아이를 낳아도 출산 후 집으로 데리고 오기 때문에 대문에 금줄을 치는 풍속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90년대가 되면 드물게 금줄을 볼 수는 있었으나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금줄을 치지 않았다. 근래에는 산후 조리까지 병원에서 다 하는 경우가 많으며,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농촌에서 아이의 울음소리는 거의 들을 수 없다. 출산율 저하와 젊은이들의 거주가 극히 적어 출생의례를 농촌 마을에서 보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최근에는 돌잔치도 대부분 행사를 전문적으로 대행해주는 전문 식당 같은 곳에서 하는 경우가 많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출생의례는 근현대에도 끓임없이 변화해왔다. 가정을 공간으로 하던 일생 의례가 오늘날은 가정 밖으로 이동하였으며, 앞으로도 사회적 변화에 비례하여 많은 변화 양상이 나타날 것이다. 가평 지역의 출생의례에 대한 다양한 기억을 수집하고 자원화 하여 지역 문화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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