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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788
한자 崔益鉉
영어공식명칭 Choi Yikhyeon
이칭/별칭 찬겸,면암,기남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기도 가평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임현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33년 12월 5일연표보기 - 최익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46년 - 최익현 이항로 문하에서 수학
활동 시기/일시 1855년 - 최익현 정시 별시명경과 병과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873년 - 최익현 동부승지 역임
활동 시기/일시 1876년 - 최익현 일본에게 개항 및 통상 반대
활동 시기/일시 1895년 - 최익현 단발령 반대 상소
활동 시기/일시 1905년 - 최익현 을사오적 처단 상소
활동 시기/일시 1906년 - 최익현 전라북도 태인에서 의병 궐기
몰년 시기/일시 1906년 11월 17일연표보기 - 최익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최익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서훈
출생지 경기도 포천현 내북면 가채리
묘소|단소 최익현 묘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21
사당|배향지 삼충단 -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운악리 488-1 지도보기
성격 문신|의병장
성별
본관 경주
대표 관직|경력 돈녕부 도정|동부승지

[정의]

1910년 경기도 가평군에 세운 삼충단에 배향된 순국지사.

[가계]

최익현(崔益鉉)[1833~1906]의 본관은 경주(慶州), 아명은 기남(奇男),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이다. 아버지는 최대(崔岱)이며, 1833년 경기도 포천현 내북면 가채리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최익현은 1846년(헌종 12) 14세 때 벽계로 은거한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6년 간 수학하였다. 대표적인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가이다. 1855년(철종 6) 정시 별시명경과에 3등급인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부정자(副正字)로 관리 생활을 시작하였다. 1868년(고종 5) 장령이었던 최익현경복궁 재건을 위한 세금을 가혹히 거두지 말 것이며 당백전을 혁파하고 문세(門稅)를 받지 않아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로 최익현은 돈녕부(敦寧府) 도정(都正)에 올랐다. 1873년에는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어 만동묘 철폐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로 최익현은 제주목(濟州牧)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조치를 받았으나, 흥선대원군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며 동시에 고종의 친정체제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1875년 2월에 석방되었다.

1876년 1월 22일 일본과 통상을 맺는 것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의 제목은 도끼를 지고 궁에 엎드려 화의를 배척하는 상소라는 뜻의 「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闕斥和議疏)」이다. 그는 이 상소에서 일본인[倭人]이 서양 오랑캐[羊胡]와 같은 도적이므로 강화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최익현은 이 상소로 인해 바로 체포당하였고, 다시 흑산도에 유배되었다가 1879년에 석방되었다. 이후 20여 년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고, 재야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몰두하였다.

1894년에는 경복궁이 일본군에 점령당한 채 갑오개혁이, 1895년 8월에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조선의 왕비가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최익현은 1895년 6월 역적을 치고 의복 제도를 복원하는 상소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갑신정변·갑오경장을 모두 비판하였다. 최익현은 이 상소에서 단발령(斷髮令)을 비판하며 소중화(小中華) 조선을 금수(禽獸)로 떨어뜨린다고 하였다. 다른 상소문에서는 왕후를 시해한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후 최익현은 수 차례 상소를 올려 갑신정변 가담자들과 일본 세력을 물리치고 조선을 올바른 소중화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계속해서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령이 되었다. 이에 최익현은 두 차례에 걸쳐 을사오적을 토죄하기를 청하는 소 「청토오적소(請討五賊䟽)」를 올려 이완용 등을 벌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4월 74세의 나이로 의병을 일으켜 역적을 토벌하는 소 「창의토적소(倡義討賊䟽)」를 올리고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라북도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순창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과 마주하였으나 전투를 포기하고 체포되었으며, 7월 쓰시마[対馬]로 귀양을 가서 같은해 11월 쓰시마 옥사에서 순국하였다.

[학문과 저술]

최익현의 저서로는 1908년에 완성된 『면암집(勉庵集)』 48권이 있다.

[묘소]

최익현이 사망하자 1907년 논산시 노성면(魯城面) 월오동면(月午洞面) 지경리(地境里)에 있는 무동산(舞童山) 아래 계좌(癸坐) 언덕에 장사하였다. 1910년 일제의 강압으로 현재의 위치인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21로 옮겼다. 최익현 묘는 1982년 8월 3일에 충청남도 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최익현은 1910년에 경기도 가평군의 삼충단(三忠壇)조병세, 민영환과 함께 배향되었다. 해방 이후 19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가평 지역 외에도 포천·청양의 모덕사(慕德祠) 등 여러 지역에서 제향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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